(신구(神龜) 5년, 무왕
10년, 728년 봄 정월) 갑인(甲寅)일에 천황이 중궁(中宮)에 나아갔는데, 고제덕(高齊徳) 등이 왕의 교서(敎書)와 방물(方物)을 바쳤다. 그 교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무예(武藝)가 아룁니다. 산하(山河)가 다른 곳이고 국토가 같지 않지만 어렴풋이 풍교도덕(風敎道德)을 듣고 우러르는 마음이 더할 뿐입니다. 공손히 생각하건대 대왕은 천제(天帝)의 명을 받아 일본의 기틀을 연 이후 대대로 명군(明君)의 자리를 이어 자손이 번성하였습니다. 무예는 황송스럽게도 열국(列國)을 맡아 외람되게 여러 번(蕃)을 함부로 총괄하며, 고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습속(習俗)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만 너무 멀어 길이 막히고 끊어졌습니다. 어진 이와 가까이하며 우호를 맺고 옛날의 예에 맞추어 사신을 보내어 이웃을 찾는 것이 오늘에야 비롯하게 되었습니다.
'무왕' 관련자료
삼가 영원장군(寧遠將軍) 낭장(郎將) 고인의(高仁義), 유장군(游將軍) 과의도위(果毅都尉) 덕주(徳周), 별장(別將) 사항(舍航) 등 24명을 보내어 장(狀)을 가지고 가도록 하였고, 아울러 담비 가죽 300장을 보내어 바칩니다. 토산물이 비록 천하지만 조그마한 물건이라도 드리는 정성을 나타내고자 하는데, 가죽과 비단이 진귀하지는 않아 도리어 손으로 입을 막고 꾸짖는 데에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이치를 주장함에는 한계가 있으나 마음을 여는 데는 끝이 없을 것입니다. 때때로 아름다운 소리를 이어받아 길이 이웃과의 우호를 돈독히 하고자 합니다.” 이에 고제덕 등 8명에게 모두 정6위상(正六位上)을 주고 해당하는 빛깔의 옷을 내렸다. 5위(五位) 이상과 고제덕 등에게 잔치를 베풀고 활쏘기 대회와 아악료(雅樂寮)의 음악을 내렸으며, 잔치가 끝나자 녹(祿)을 주었는데 차등이 있었다.
『속일본기』권10, 신구 5년(728) 봄 1월(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