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덕왕 14년(822)] 3월 웅천주도독(熊川州都督) 헌창(憲昌)이 그의 아버지 주원(周元)이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이유로 반란을 일으켜 나라 이름을 장안(長安)이라 하고 연호(年號)를 세워 경운(慶雲) 원년이라고 하였다. 무진(武珍)⋅완산(完山)⋅청주(菁州)⋅사벌(沙伐)의 네 주 도독과 국원경(國原京)⋅서원경(西原京)⋅금관경(金官京)의 사신(仕臣)과 여러 군현 수령을 위협하여 자기 소속으로 삼으려 하였다. 청주 도독 향영(向榮)은 몸을 빠져 나와 추화군(推火郡)으로 달아났고, 한산주(漢山州)⋅우두주(牛頭州)⋅삽량주(歃良州)와 패강진(浿江鎭)⋅북원경(北原京) 등은 헌창의 반역 음모를 미리 알고 군사를 일으켜 스스로 지켰다.
18일에 완산주 장사(長史) 최웅(崔雄)과 주조(州助) 아찬(阿飡) 정련(正連)의 아들 영충(令忠) 등이 왕경(王京)으로 도망해 와 그 일을 알렸다. 왕은 곧 최웅에게 급찬(級飡)의 관등과 속함군(速含郡) 태수(太守)의 관직을 주고, 영충에게는 급찬의 관등을 주었다. 마침내 장수 여덟 명을 뽑아 왕도(王都)를 여덟 방면에서 지키게 한 다음 군사를 출동시켰다. 일길찬(一吉飡) 장웅(張雄)이 먼저 출발하고 잡찬(迊湌) 위공(衛恭)과 파진찬(波珍飡) 제륭(悌凌) 등이 그 뒤를 따랐으며, 이찬(伊飡) 균정(均貞)과 잡찬 웅원(雄元), 그리고 대아찬(大阿飡) 우징(祐徵) 등이 3군을 이끌고 출정하였다. 각간(角干) 충공(忠恭)과 잡찬 윤응(允膺)은 문화관문(蚊火關門)을 지켰다. 명기(明基)와 안락(安樂), 두 화랑(花郎)이 각기 종군할 것을 청하여 명기는 낭도(郎徒)의 무리와 함께 황산(黃山)으로 나아가고, 안락은 시미지진(施彌知鎭)으로 나아갔다.
이에 헌창이 장수를 보내 중요한 길목에 자리 잡고 관군을 기다렸다. 장웅은 도동현(道冬峴)에서 적병을 만나 이를 공격해 이겼고, 위공과 제륭은 장웅의 군사와 합하여 삼년산성(三年山城)을 쳐서 이기고 속리산으로 진군하여 적병을 공격하여 섬멸시켰으며, 균정 등은 성산(星山)에서 적군과 싸워 이를 멸하였다. 여러 군대가 함께 웅진(熊津)에 이르러 적과 크게 싸웠는데, 죽이고 사로잡은 것을 이루 다 셀 수 없었다. 헌창은 겨우 몸을 피하여 성에 들어가 굳게 지키고 있었다. 여러 군사가 성을 에워싸고 열흘 동안 공격하여 성이 장차 함락되려 하자 헌창은 화(禍)를 면할 수 없음을 알고 스스로 죽으니, 그를 따르던 사람이 머리를 베어 몸과 각각 따로 묻어 두었다.
성이 함락되자 그의 몸을 옛 무덤에서 찾아내어 다시 베고, 그의 종족(宗族)과 함께 일을 도모했던 무리를 무릇 239명이나 죽였으며, 그 백성을 풀어 주었다. 그런 다음 싸움의 공을 논하여 벼슬과 상을 차등 있게 주었는데, 아찬 녹진(祿眞)에게는 대아찬의 관등을 주었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삽량주의 굴자군(屈自郡)은 적군에 가까이 있었으나 반란에 물들지 않았으므로 7년간 조세를 면제해 주었다.
『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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