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학(國學)
은 예부(禮部)에 속하였는데, 신문왕(神文王) 2년(682)에 설치하였다. 경덕왕(景德王)이 태학감(太學監)
으로 고쳤으나 혜공왕(惠恭王)이 옛 이름대로 하였다. 경(卿)은 1명이었는데 경덕왕이 사업(司業)으로 고쳤으나 혜공왕이 다시 경으로 칭하였다. 관등은 다른 경과 같았다. 박사(博士)
【약간 명이었는데, 수는 정하지 않았다】
와 조교(助敎)
【약간 명이었는데, 수는 정하지 않았다】
가 있었다. 대사(大舍)는 2명이었는데 진덕왕(眞德王) 5년(651)에 설치하였다. 경덕왕이 주부(主簿)로 고쳤으나 혜공왕이 다시 대사로 칭하였다. 관등이 사지(舍知)에서 나마(奈麻)까지인 자로 임용하였다. 사(史)는 2명이었는데 혜공왕 원년(765)에 2명을 더하였다. 교수하는 법은 『주역(周易)』⋅『상서(尙書)』⋅『모시(毛詩)』⋅『예기(禮記)』⋅『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문선(文選)』 등으로 나누어 이를 업(業)으로 삼도록 하였다. 박사나 조교 1명이 혹은 『예기』⋅『주역』⋅『논어(論語)』⋅『효경(孝經)』으로써, 혹은 『춘추좌씨전』⋅『모시』⋅『논어』⋅『효경』으로써, 혹은 『상서』⋅『논어』⋅『효경』⋅『문선』으로 가르쳤다. 여러 학생은 글을 읽어 세 등급으로 벼슬길에 나아갔는데, 『춘추좌씨전』이나 또는 『예기』, 또는 『문선』을 읽어 능히 그 뜻을 통달하고 아울러 『논어』와 『효경』에도 밝은 자를 상(上)으로 하였고, 『곡례(曲禮)』⋅『논어』⋅『효경』을 읽은 자를 중(中)으로 하였고, 『곡례』⋅『효경』을 읽은 자를 하(下)로 하였으며, 만약 오경(五經)과 삼사(三史)와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서(書)를 아울러 통달한 자는 등급을 넘어 발탁하였다. 혹은 산학박사(算學博士)나 조교 1명을 뽑아 『철경(綴經)』⋅『삼개(三開)』⋅『구장(九章)』⋅『육장(六章)』을 가르치게 하였다. 무릇 학생은 관등이 대사 이하에서 관등이 없는 자에 이르기까지 나이는 15세에서 30세까지인 자를 모두 입학시켰다. 9년을 기한으로 하되 만약 우둔하여 깨닫지 못하는 자는 퇴학시켰으며, 만약 재주와 기량이 성취할 만하나 미숙한 자는 비록 9년이 넘어도 재학을 허락하였다. 그리고 관등이 대나마(大奈麻)⋅나마에 이른 후에 국학
을 나가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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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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