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스님께서 옥룡사(玉龍寺)에 자리 잡지 않고 지리산(智異山) 구령(毆嶺)에 암자를 짓고 주석하셨다. 어느 날 어떤 이상한 사람이 찾아와 좌하(座下)에서 스님께 다음과 같이 여쭈어다. “제자(弟子)는 세상 밖에서 깊이 숨어서 살아온 지가 벌써 수백 년에 가깝습니다. 조그마한 기술이 있어 높은 스님께 받들어 올리려 하오니, 만약 천한 술수라 하여 비루하게 여기지 않으시면 다른 날 남해(南海)의 바닷가에서 마땅히 알려 드리겠습니다. 이것 또한 대보살(大菩薩)이 세상을 구제하며, 중생을 제도하는 법이옵니다.” 말을 마치고는 홀연히 어디론가 사라졌다. 스님께서 기이하게 여겨 약속했던 곳으로 찾아가보니 과연 그 사람을 만났다. 그는 곧 모래를 끌어 모아 산천에 대한 순역(順逆)의 형세를 만들어 보여 주었다. 돌아본 즉 그 사람은 이미 없었다. 그곳이 현재의 구례현(求禮縣) 경계이니, 그 지방 사람들이 사도촌(沙圖村)이라 일컫는다. 이로 말미암아 스님은 스스로 홀연히 깨닫고, 더욱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술(術)을 연구하였다. 비록 금단(金壇)과 옥급(玉笈) 등 유수한 비결이라도 모두 흉중에 담았다.
그 후 신라의 정교(政敎)가 쇠퇴하여 국가 위망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스님은 장차 성인이 천명을 받아 특별히 일어날 사람이 있을 줄 알고, 그 길로 송악군(松岳郡)으로 갔다. 그때 우리 세조(世祖)
고려 태조(太祖)의 부친
께서 군(郡)에 있으면서 마침 거택을 짓고 있었다. 스님께서는 그 문 앞을 지나면서 이르기를, “아! 이곳은 마땅히 왕자(王者)가 출생할 곳이건만 다만 이 집을 경영하는 자는 알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라고 말했다. 그때 마침 시종[靑衣]이 이 말을 듣고 집 안으로 들어가서 세조에게 이 사실을 전하였다. 세조가 급히 나와 스님을 집 안으로 맞아 들여 그 방책을 자문하고 집을 고쳐지었다. 스님께서 말하기를, “2년 후에 반드시 귀한 아들을 낳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어 책 1권을 지어 겹겹으로 봉하여 세조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이 책은 아직 출생하지 아니한 군왕에게 바치는 것입니다. 나이가 장실(壯室)
30세
에 이른 후에 전해 주십시오.”라고 당부하였다. 이 해에 신라 헌강왕(憲康王, 재위 875~886)이 즉위하였는데, 당(唐) 건부(乾符) 2년(875)에 해당된다. 4년에 이르러 태조(太祖)
가 과연 앞서 저택에서 탄생하였다. 그 후 장년에 이르러 스님이 전해 준 책을 받아 보고서야 천명이 자신에게 내려진 줄 알고, 드디어 포악한 무리를 제거하고 비로소 나라를 세웠다. 공손히 신성(神聖)의 뜻을 받든 것이지, 어찌 천하를 소유할 욕심이 있었겠는가? 그 까닭은 반란의 무리를 무찌르고, 정의로 돌아가서 국민을 도탄으로부터 구제하여 수역(壽域)에 오르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큰 위업과 아름다운 덕이 끝없이 전할 것이다. 아무리 다시 하늘이 유덕(有德)한 이를 돕고 백성이 모두 인의를 품었더라도, 그 성스러운 시대를 창업하여 아득한 가운데 정해진 운수로 받은 것은 그 원인이 대개 우리 스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태조(太祖)' 관련자료
「옥룡사선각국사
'선각국사' 관련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