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兵)은 외침을 막고 내란을 진압하기 위한 것으로, 천하의 국가를 가진 자는 진실로 폐지할 수 없으니, 병제의 득실에 국가의 안위(安危)가 달려 있다. 고려 태조
는 삼한(三韓)1)
을 통일하고 비로소 6위(六衛)
를 설치하였으며, 위(衛)에는 38령(領)을 두었는데, 영은 각각 1,000명이었다. 상하가 서로 연결되고 체계가 서로 짜임새가 있어 당(唐)나라의 부위제(府衛制) 와 거의 비슷하였다. 숙종(肅宗)
때 이르러 동여진(東女眞)이 전쟁을 일으키려는 조짐을 보이자 마음을 단단히 하여 힘써 이를 방어하고자 날마다 군사를 훈련하다가 마침내 별무반(別武班)
을 조직하였다. 여기에는 산관(散官)
'고려 태조' 관련자료
1)
삼한의 용례를 보면, 마한(馬韓)⋅변한(弁韓)⋅진한(辰韓)을 통칭하여 쓰는 경우와 삼국(三國)이나 우리나라의 의미로 사용된 경우가 있다. 따라서 삼한에 대한 여러 논의와 용례에는 각 시대 역사 인식이 반영되어 있다. 후삼국 시대에는 삼한을 각각 삼국과 대응시켜 분립적으로 의식하는 면과 삼한이 우리나라라는 인식이 함께 있었다. 여기서는 후삼국을 지칭한다.
'6위(六衛)' 관련자료
'숙종(肅宗)' 관련자료
'별무반(別武班)' 관련자료
관직을 원하는 인원은 많으나 관직 수가 제한되어 있어 실직이 아닌 산직을 준 사람
⋅이서(吏胥)
행정의 말단 실무에 종사한 품외(品外) 하급 관리의 한 부류로서 중앙의 각사(各司)에 소속됨
들로부터 상인⋅천예(賤隷)
천민과 노예
⋅승려에 이르기까지 소속되지 않은 이가 없었다. 비록 이것은 옛 제도와 맞지는 않았으나, 한때 이를 활용하여 성과를 거둔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의종(毅宗)
과 명종(明宗)
이후 권신(權臣)들이 정권을 장악하고 병권(兵權)이 신하에게 옮겨지면서 용맹한 장수와 강성한 병졸들은 모두 개인에게 소속되었다. 바야흐로 국가에 사방으로 도적들이 크게 일어나도 나라에 일려(一旅) 의 군사도 없었다. 이 때문에 매우 급박한 사태에 직면했지만 군대는 전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그런 이후에 비로소 여러 방면으로 군사들을 징발하였는데, 수도에서 신분에 관계없이 군사를 모으거나 혹은 문⋅무의 산직(散職)⋅백정(白丁)
'의종(毅宗)' 관련자료
'명종(明宗)' 관련자료
고려 시대 특정한 직역을 부담하지 않아 국가로부터 토지를 분급받지 못한 양인(良人)
⋅잡색(雜色)
기술과 관련한 일을 담당한 잡업
계통의 이속직(吏屬職)
을 검열하거나 또는 4품 이상 관리들의 가동(家僮)
'잡업' 관련자료
집 안의 잡일을 하는 어린 사내 종
을 뽑았다. 혹은 가옥 칸수의 많고 적음에 따라서 차등을 두기도 했다. 국가의 형편이 이러한 지경에까지 갔으니 아무리 위태롭지 않고자 한들 어떻게 가능했겠는가? 국가의 큰일이 군사(軍事)에 있으니 그 제도를 자세히 갖추어 기록해야 마땅하나, 애석하게도 앞서의 역사 기록이 소략하다. 지금 특히 상고할 수 있는 것을 기록하면 병제(兵制)⋅숙위(宿衛)⋅진수(鎭戍)⋅간수군(看守軍)⋅위숙군(圍宿軍)⋅검점군(檢點軍)⋅주현군(州縣軍)⋅선군(船軍)⋅공역군(工役軍)이다. 그밖에 참역(站驛)⋅마정(馬政)⋅둔전(屯田)⋅성보(城堡) 또한 병(兵)에 포함할 수 있는 까닭에 함께 첨부하여 병지를 만든다.
『고려사』권81, 「지」35 [병1] 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