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 시대 이전에는 과거법(科擧法)이 없었고 고려 태조(太祖, 918~943)
가 먼저 학교를 세웠으나 과거로 인재를 뽑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광종(光宗, 950~975)
이 쌍기(雙冀, ?~?)의 의견을 받아들여 과거로 인재를 뽑자, 이때부터 학문을 숭상하는 풍습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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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관한 법은 대체로 당나라 제도를 많이 채용하였다. 학교에는 국자학(國子學)
에 속하였다. 과거 시험에는 제술(製述)
가 있었는데, 각기 그 과에 맞게 시험을 치고 합격자를 가렸다. 국자감
의 승보시
국자감 유학부 중 하나로 3품 이상의 자제 입학
⋅태학(太學)
국자감 유학부 중 하나로 5품 이상의 자제 입학
⋅사문학(四門學)
국자감 유학부 중 하나로 7품 이상의 자제 입학
이 있었고 또 9재 학당(九齋學堂)
최충이 세운 9개 전문 과정으로 구성된 사립 학교
이 있었는데, 율학(律學)⋅서학(書學)⋅산학(算學)은 다 국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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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부송책 등 글을 짓는 능력으로 시험
⋅명경(明經)
유교 경전에 대한 지식으로 시험
두 과가 있었고, 의학과 점복⋅지리⋅율학⋅서학⋅산학⋅삼례(三禮)
예기⋅주례⋅의례를 시험
⋅삼전(三傳)
춘추의 주해서인 좌전⋅공양전⋅곡량전을 시험
⋅하론(何論)
효경⋅곡례의 이해 능력을 시험
등 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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升補試, 생원을 뽑는 시험으로 국자감 입학시험의 일종
또한 후진을 격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비록 이름 있는 경대부(卿大夫)라도 반드시 과거를 거쳐 벼슬에 나아간 것은 아니었다. 과거 외에도 숨은 인재의 추천, 문음에 의한 서용, 성중애마(成衆愛馬 1)
)의 선발 배치, 남반(南班)
1)
고려 전기에는 내시 등 왕의 근시직을 ‘성중관’이라 일컬었다. 특히 내시에는 귀족의 자제들이 소속되어 국왕과 잦은 접촉을 통해 고위직으로 올라가는 일이 많았다. 이후 몽골과의 관계가 긴밀해지면서 이들의 숙위를 맡은 ‘애마’와 고려의 ‘성중관’이 합쳐져 성중애마(成衆愛馬)의 칭호가 생겼다.
궁중의 숙직, 왕의 시종, 왕명 전달 등의 사무를 맡아 보던 내관직
⋅잡로(雜路)
관청의 말단 서리 층의 관직 진출로
등이 있어 벼슬에 나아가는 길이 한 가지만은 아니었다. 원래 과거법 제정 초기에는 인재를 양성하는 방식과 뽑는 제도, 임명하는 방법 등에 질서가 잡혀 있었으며, 대대로 자손들이 그 법을 따라 제도를 잘 유지했으므로 우리나라의 문물이 중국과 비견될 정도로 융성하였다. 그러나 권신(權臣)들이 사적으로 정방(政房)
라는 비방과 분홍(粉紅) 급제3)
라는 비난이 한 때 널리 퍼졌으며, 고려의 왕업도 마침내 쇠락해졌다.
무신 집권기 최우가 자기 집에 설치해 인사 행정을 처리한 기관으로 고려 후기 국가 기관이 됨
을 설치하면서부터 정사는 모두 뇌물로 이루어지고 인물 심사법이 문란해졌을 뿐 아니라 과거로 인재를 뽑는 제도 역시 어지러워졌다. 이때부터 흑책(黑冊) 정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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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려 후기 인사 행정이 매우 문란했음을 비유한 말이다. 흑책이란 두꺼운 종이에 먹칠을 하고 기름을 먹여 아이들이 글씨를 연습하는 데 썼던 것인데, 충숙왕(忠肅王, 재위 1313~1330, 1332~1339)
때 왕의 측근들이 벼슬 임명장을 자신들의 마음대로 마구 고쳐 내용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만든 것에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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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과거 시험으로 세력가의 어린 자제들이 많이 뽑힌 폐단을 비유한 말이다. 고려 시대 어린아이들이 분홍색을 많이 입었다는 것에서 유래하였다.
과거 제도
절목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거의 다 유실되었기 때문에, 역사서들에서 이와 관련된 내용을 찾아 자세한 것은 자세하게, 간략한 것은 간략하게 조목으로 나누고 같은 것들을 함께 묶어서 선거지(選擧志)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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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권73, 「지」27 [선거1] 서문
- 고려 전기에는 내시 등 왕의 근시직을 ‘성중관’이라 일컬었다. 특히 내시에는 귀족의 자제들이 소속되어 국왕과 잦은 접촉을 통해 고위직으로 올라가는 일이 많았다. 이후 몽골과의 관계가 긴밀해지면서 이들의 숙위를 맡은 ‘애마’와 고려의 ‘성중관’이 합쳐져 성중애마(成衆愛馬)의 칭호가 생겼다.
- 고려 후기 인사 행정이 매우 문란했음을 비유한 말이다. 흑책이란 두꺼운 종이에 먹칠을 하고 기름을 먹여 아이들이 글씨를 연습하는 데 썼던 것인데, 충숙왕(忠肅王, 재위 1313~1330, 1332~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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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 시험으로 세력가의 어린 자제들이 많이 뽑힌 폐단을 비유한 말이다. 고려 시대 어린아이들이 분홍색을 많이 입었다는 것에서 유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