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청(妙淸, ?~1135)
은 서경
의 승려로, 후에 정심(淨心)
으로 이름을 고쳤다. 인종
6년(1128)에 일관(日官) 백수한(白壽翰, ?~1135)이 검교소감(檢校少監)으로서 서경
분사(西京分司)에 있으면서 묘청
을 스승이라 불렀다. 두 사람은 음양비술(陰陽秘術)을 가지고 여러 사람을 현혹했다. 정지상(鄭知常, ?~1135)
도 서경
사람인데, 그들의 말을 깊이 믿고 상경(上京=개경)
의 운이 이미 쇠진하였으며 궁궐이 다 타 없어졌지만 서경(평양)
은 제왕의 기운이 있으므로 임금이 이곳으로 수도를 옮겨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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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왕의 근신인 내시낭중(內侍郎中) 김안(金安)과 모의하여 말하기를 “우리가 만약 임금을 모시고 옮겨 가서 서경
을 수도로 만든다면 마땅히 중흥공신(中興功臣)이 될 것이니 단지 우리 한 몸이 부귀를 누릴 뿐만 아니라 자손을 위해서도 무궁한 복이 될 것이다”라 하고는 서경 천도
를 떠들고 다니면서 매우 칭찬하였다. 근신(近臣) 홍이서(洪彛敍)와 이중부(李仲孚), 그리고 대신 문공인(文公仁), 임경청(林景淸)도 동의하였다. 마침내는 “묘청
은 성인이요, 백수한 역시 그 다음 가는 성인이니 국가의 일을 일일이 자문한 후에 시행하고 그의 의견을 받아들인다면 정치가 제대로 될 것이고 국가의 태평을 보존할 것입니다”라는 상소문을 올렸다. 그리고 모든 관원에게 서명할 것을 요구했는데, 평장사 김부식(金富軾)
과 참지정사 임원애(任元敳), 승선 이지저(李之氐)만이 서명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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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소문을 보자 왕은 비록 의심을 품었으나 여러 사람이 적극 주장하였으므로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묘청
등이 왕에게 건의하기를, “우리들이 보건대 서경
임원역(林原驛)의 땅은 음양가들이 말하는 대화세(大華勢)이니 만약 이곳에 궁궐을 세우고 수도를 옮기면 국가의 혼란을 막을 수 있으며 금(金)나라가 공물을 바치고 스스로 항복할 것이며 36개 나라들이 모두 신하가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드디어 서경
으로 가서 수행한 재상 재추(宰樞)들에게 명령하여 묘청
과 백수한을 데리고 임원역으로 가서 지세를 보게 하고 김안을 시켜 궁궐을 새로 짓게 하였다. 그런데 공사를 매우 급히 다그치며 진행한 데다 매우 추운 때를 만나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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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청
과 백수한이 또 왕에게 아뢰기를 “개경
의 지세(地勢)가 쇠퇴하였으므로 하늘이 재앙을 내려 궁궐이 모두 타 버렸으니 자주 서경
으로 행차하여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맞이하여 무궁한 큰 업적을 이룩하소서!”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여러 일관(日官)에게 물으니 모두 다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정지상
, 김안 그리고 몇 명의 대신이 말하기를 “묘청
이 말하는 것은 즉 성인의 법이니 어길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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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호를 대위(大爲)라 하고 연호는 천개(天開)라 하였으며 그 군대를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 하였다. 그리고 관속을 배치하였는데 양부(兩府)에서 각 주군의 수령에 이르기까지 모두 서경
사람으로 임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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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권127, 「열전」40 [반역1] 묘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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