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우
가 재추(宰樞)
를 두려워하여 감히 말을 하는 자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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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부(宰府)와 중추원
들을 자신의 집으로 모아 놓고 천도할 일을 의논하였다. 당시 국가가 태평한 지 이미 오래되어 수도의 호수(戶數)가 10만에 이르고, 단청한 좋은 집들이 즐비하였으며, 사람들도 자신의 거처를 편안하게 여겨 천도를 곤란하게 생각하였으나, 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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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단(兪升旦, 1168~1232)이 말하기를, “작은 나라가 큰 나라 섬김은 이치에 당연한 일입니다. 예로써 섬기고 믿음으로써 사귀면, 저들 역시 무슨 명분으로 항상 우리를 괴롭히겠습니까? 성곽을 버리고 종묘사직을 돌보지 않고 섬으로 도망하여 구차스럽게 세월만 끌며, 변방의 장정들이 칼날에 다 죽고 노약자들이 끌려가 종이나 포로가 되게 하는 것은 국가의 장구한 계책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야별초지유(夜別抄指諭) 김세충(金世沖, ?~1232)이 문을 밀치고 들어가 최우
를 꾸짖으며 말하기를, “송경(松京)
때부터 역대로 지켜 온 것이 무려 200여 년이 되었습니다. 성이 견고하고 군사와 양식이 풍족하기 때문에 힘을 합하여 지켜서 사직을 호위해야 마땅할 것인데, 이를 버리고 장차 도읍할 땅이 어디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최우
가 성을 지킬 계책을 물었으나 김세충은 대답하지 못하였다. 어사대부 대집성(大集成, ?~1236)이 최우
에게 말하기를, “김세충이 아녀자의 말로 감히 대의를 막으려 하니 그의 목을 베어 나라 안팎으로 보이십시오” 하였다.응양군(鷹揚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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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 또는 송도(松都)는 고려의 도읍인 개경을 말함
은 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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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친위군
상호군(上護軍)
상장군
김현보(金鉉寶) 또한 대집성의 비위를 맞추고자 그렇게 말하니, 드디어 김세충을 끌어내어 목을 베었다. 이날 최우
가 왕에게 속히 궁궐을 떠나 서쪽 강화도로 행차할 것을 주청하였는데 왕이 망설이면서 결정하지 못하였다. 최우
가 녹봉을 실어나르는 수레 100여 량을 빼앗아 집안의 재물을 강화도로 옮기니 도성 안 민심이 흉흉해졌다. 최우
가 담당 관리들에게 영을 내려 날짜를 정하여 개경(開京)
의 5부(五部) 백성을 보내도록 하고, 성 안에 방을 붙여 이르기를, “시간을 지체하여 출발할 기일에 미치지 못하는 자는 군법으로 논(論)하리라” 하고, 또 사자를 여러 도(道)로 보내어 백성을 섬이나 산성(山城)으로 옮기도록 했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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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경(開京)' 관련자료
을유일에 왕이 개경
을 출발하여 승천부(昇天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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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풍덕군
에서 머무르고 병술일에 강화도의 객관에 들어갔다. 이때 장맛비가 열흘이나 계속 내려 진흙이 발목까지 빠져 사람과 말들이 쓰러지곤 하였다. 지체 높은 집안이나 양가의 부녀들 중에는 맨발로 업고 이고 하는 자까지 있었다. 홀아비와 과부, 고아와 자식 없는 노인으로서 갈 곳을 잃고 소리 내어 우는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려사절요』권16, 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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