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등이 삼가 보건대, 3월 18일 궁전 안에서 문수회(文殊會)가 열렸을 때, 영도첨의(領都僉議) 신돈(辛旽, ?~1371)
이 재상의 자리에 앉아 있지 않고 감히 전하와 함께 나란히 앉아 그 거리가 몇 자에 불과했으니, 온 나라 사람이 놀라 흉흉해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대저 예란 상하의 계급을 구별하여 백성의 뜻을 안정시키는 것이니, 진실로 예법이 없다면 무엇으로 군신이 되며, 무엇으로 부자가 되며, 무엇으로 국가를 다스리겠습니까. 성인께서 예법을 마련하여 상하의 명분을 엄격하게 한 것은 깊은 생각이 있어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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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보건대 신돈
은 임금의 은혜를 지나치게 입어 나라의 정사를 제멋대로 하고 임금을 무시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당초 영도첨의로서 감찰(監察)을 맡게 되던 날 예법에 따른다면 당연히 조복을 차려 입고 전하께 나아가 은혜에 감사하여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15일간이나 나오지 않더니, 궁궐에 들어와서는 무릎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습니다. 늘 말을 타고 홍문(紅門)을 출입하며 전하와 함께 호상(胡床)에 앉았습니다. 집에 있을 때는 재상들이 그 집 마당 아래서 절을 해도 모두 앉아서 접대하였습니다. 최항(崔沆)⋅김인준(金仁俊)⋅임연(林衍) 같은 이들도 이러지는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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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승려였을 때는 당연히 법도의 밖에 있으니 그 무례함을 책망할 것은 없습니다만, 이젠 재상이 되어 명분과 지위가 이미 정해졌으니, 감히 예법을 잃고 윤리를 허물기를 이와 같이 하겠습니까. 그 이유를 따진다면 반드시 (신돈
이 국왕의) 사부(師傅)라는 명분을 내세우겠지만, 유승단(兪升旦)은 고종
의 스승이요, 정가신(鄭可臣)은 덕릉(德陵)
의 외조부였으므로 인종
이 겸양하여 할아버지와 손자의 예로서 서로 만나려 하였으나 공론이 두려워서 감히 하지 못하였습니다. 대개 군신의 명분이란 본래부터 정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예법이란 군신이 생긴 이래로 만고를 지나도 바꾸어지지 못하는 것이니, 신돈
과 전하께서 사사로이 고칠 바는 아니라 생각되옵니다. 신돈
이 어떠한 사람이길래 감히 스스로 높이기를 이와 같이 하겠습니까.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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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선왕
의 스승이었으나, 신 등은 그 두 사람이 감히 이런 일을 하였다는 말을 못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자겸(李資謙)은 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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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전하께서 신돈
을 어진 이라고 하셨지만 신돈
이 일을 맡은 이래로 음양이 절기를 잃어 겨울철에 천둥이 치고 누런 안개가 사방에 가득하며, 열흘이 넘도록 해가 검고 밤중에 붉은 기운이 돌고 천구성(天狗星)
에게 내린 논도섭리공신(論道燮理功臣)의 호가 과연 천지와 조종의 뜻에 맞는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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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이나 혜성
이 땅에 떨어졌으며, 나무의 고드름이 지나치게 심하고, 청명(淸明)
24절기의 다섯 번째 절기, 음력 3월
이 지난 뒤에도 우박과 찬바람이 일어 하늘의 기후가 여러 차례 변하고, 산새와 들짐승이 대낮에 성 안으로 날아들고 달려드니, 신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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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등은 직책이 사간원(司諫院)에 있으므로, 전하를 돕는 자로서 그 능력이 모자라 장차 사방의 웃음거리이자 대대로 희롱의 대상이 될까 두려워, 침묵을 지킬 수 없어 (상소를 올림으로써) 말하지 않는다는 책망을 면하려 하옵니다. 말씀 드린 바에 대해 삼가 결정이 있기를 기다리겠습니다.
『동문선』권52 「주의」 논신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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