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
10년(1361) 겨울에 홍건적
위평장(僞平章) 반성(潘誠)⋅사유(沙劉)⋅관선생(關先生)⋅주원수(朱元帥)⋅파두번(破頭潘) 등 20만 군사가 압록강을 건너 서북 변방에 함부로 들어와서 우리에게 글을 보내기를, “군사 110만을 거느리고 동쪽 땅으로 가니 속히 맞아 항복하라”고 하였다. 태조(이성계)
가 적의 왕 원수(王元帥) 이하 100여 명의 목을 베고 한 명을 사로잡아서 왕에게 바쳤다. 11월에 공민왕
이 남쪽으로 피난하자, 홍건적
이 개경
을 점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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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실록』총서, 공민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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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
11년(1362) 임인 정월에 참지정사(參知政事) 안우(安祐, ?~1362) 등 9원수(元帥)가 군사 20만 명을 거느리고 나와서 개경
을 되찾고 적의 괴수 사유(沙劉)⋅관선생(關先生) 등의 목을 베었으니, 적의 목을 벤 것이 대개 10여만이나 되었다. 이때 태조
는 휘하(麾下)의 친위 군대 2000명을 거느리고 동대문으로 들어가서 먼저 성에 올라 적을 크게 부수니, 명성이 더욱 빛났다. 성을 공격하는 날에 적이 비록 궁지에 몰렸으나 보루를 쌓아 굳게 지켰다. 날이 저물자 여러 군대들이 전진하여 이를 포위하고 핍박(逼迫)하였다. 태조
는 길가의 한 집에 머물고 있었는데 밤중에 적이 포위를 뚫고 달아났다. 태조
가 (이를 보고 뒤쫓아) 달려가 동문(東門)에 이르니, 적과 우리 군사가 문을 먼저 나가려고 다투었으나 매우 어수선하여 나갈 수가 없었다. 뒤에서 적이 다가와 창으로 태조
의 오른쪽 귀 뒤를 급히 찌르려 하자, 태조
는 칼을 빼어 앞에 있는 적 7, 8명을 베고 말을 채찍질해 뛰게 하여 성을 넘었는데 말이 미끄러져 넘어지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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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실록』총서, 공민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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