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 명나라 황제가 말하기를, “철령을 따라 이어진 북쪽과 동쪽과 서쪽은 원래 개원로(開元路)
이 백관(百官)을 모아 이 일을 의논하니, 모두 “(명나라에) 내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우왕(禑王)
은 최영
과 비밀히 의논하여 요동을 치고자 하였다. 이에 공산부원군(公山府院君) 이자송(李子松)이 최영
의 집으로 가서 옳지 못함을 강력하게 말하였다. 최영
은 자송(子松)이 임견미(林堅味)와 한 편이 되었다는 이유로 곤장을 쳐서 전라도 내상(內廂)으로 유배 보냈다가 얼마 뒤에 그를 죽였다.
원나라가 중국 동북 지방에 설치한 행정 구역
에서 관할하던 군민(軍民)이 소속해 있던 곳이니, 중국인⋅여진인⋅달달인(達達人)⋅고려인을 그대로 요동에 소속시켜야 된다”고 하였다. 최영(崔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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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왕
이 서북면 도안무사(都安撫使)로부터 “요동 군사가 강계(江界)에 이르러 장차 철령위(鐵嶺衛)
를 세우려 한다”는 보고를 받고 울면서 말하기를, “신하들이 나의 요동을 공격하려는 계책을 듣지 않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라고 하였다. 명나라에서 다시 요동 백호(遼東百戶) 왕득명(王得明)을 보내 철령위
설치를 알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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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4월, 봉주(鳳州)에 머물렀다. (우왕
이) 태조
에게 “과인이 요동을 공격하고자 하니 경(卿) 등은 마땅히 힘을 다하라” 하였다. 태조
가 아뢰기를, “지금 출사(出師)하는 일은 네 가지의 옳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에 거역하는 것이 첫 번째 옳지 못함이요,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이 두 번째 옳지 못함이요, 온 나라 군사를 동원하여 멀리 정벌하면, 왜적이 그 허술한 틈을 탈 것이니 세 번째 옳지 못함이요, 지금 한창 장마철이므로 활[弓弩]은 아교가 풀어지고 많은 군사가 역병(疫病)을 앓을 것이니 네 번째 옳지 못함입니다” 하였다. 우왕
이 이를 자못 옳게 여겼다. 태조
가 이미 물러나와 최영
에게 이르기를, “내일 마땅히 이 말로써 다시 아뢰시오” 하니, 최영
이 “좋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밤에 최영
이 들어가서 우왕
에게 아뢰기를, “원컨대, 다른 말은 듣지 마소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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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우왕
이 태조
에게 “이미 군사를 일으켰으니 중지할 수가 없소” 라고 하였다. 태조
가 아뢰기를, “전하께서 반드시 큰 계책을 성공시키고자 하신다면, 서경(西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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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에 어가(御駕)를 머무르셨다가 가을에 출병하면, 볏곡이 들판을 덮어 많은 군사가 식량이 넉넉하게 되어 북을 치면서 행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군사를 일으킬 시기가 아니므로, 비록 요동의 한 성(城)을 함락시키더라도 비가 한창 내려 군대가 전진할 수도 퇴각할 수도 없고 군대가 피곤하고 군량이 없게 되어 다만 화를 초래할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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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왕
이 말하기를, “경은 이자송(李子松)의 일을 보지 못했는가” 하니 태조
가 아뢰기를, “자송(子松)은 비록 죽었으나 아름다운 명성이 후세에 전하지마는, 신 등은 비록 살아 있더라도 이미 계책을 잘못 썼으니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였으나, 우왕
은 듣지 않았다. 태조
가 물러나와 울고 있기에 휘하 군사가 “공은 어찌 이다지도 슬퍼하십니까?” 하니, 태조
는 말하기를 “백성의 재화(災禍)가 이제부터 시작이로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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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왕
이 평양에 머물면서 여러 도의 군사의 징발을 독촉하여 압록강에 부교(浮橋)를 만들고, 또 승려들을 징발하여 군사로 만들었다. 최영
을 팔도도통사로 삼고,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 조민수(曺敏修)를 좌군도통사, 태조
를 우군도통사로 삼아 보냈다. 좌군과 우군이 합하여 5만여 명인데, 여러 사람이 10만 명이라 선전하였다. 군사가 출동하려 하는데 우왕
이 술에 취하여 해가 늦도록 일어나지 않으니, 여러 장수가 하직 인사를 하지 못하였다. 조금 뒤에 술이 깨매, 석포(石浦)에서 배를 띄우고 놀다가 저녁때가 되어서야 돌아와 여러 장수에게 술을 마시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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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군대가 평양을 출발하는데 최영
이 우왕
에게 아뢰기를, “지금 대군(大軍)이 출전하는 도중에 있는데 만약 열흘이나 한 달 가량 지체한다면 대사(大事)가 성공하지 못할 것이니, 신이 가서 이를 감독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우왕
이 말하기를, “경이 간다면 누구와 더불어 정사를 하겠는가?” 하였다. 최영
이 강하게 청하니 우왕
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과인도 또한 가겠다”라고 하였다. 어느 사람이 이성(泥城)으로부터 와서 말하기를, “요사이 요동 군사가 모두 오랑캐 정벌에 갔기 때문에 성중(城中)에는 다만 한 사람의 지휘관이 있을 뿐입니다. 대군이 만약 이른다면 싸우지 않고도 항복시킬 수 있습니다” 하니, 최영
이 크게 기뻐하여 그 사람에게 물품을 후히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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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왕
은 홍무(洪武)1)
의 연호(年號)를 정지시키고 나라 사람들에게 오랑캐 의복[胡服]을 다시 입게 하였다. 늘 대동강에 나가서 오랑캐의 음악[胡樂]을 부벽루(浮碧樓)에서 연주하도록 하고, 자기 스스로 호적(胡笛)을 불면서 즐거워하여 돌아올 줄을 잊고 있었다. 매양 나가서 놀 적에는 오랑캐의 음악을 연주하게 하고 광대들에게 갖가지 유희(遊戲)를 보이게 하였다. 최영
은 매일 군사를 거느리고 드나들면서 피리[笛]를 불었다. 임금과 신하가 주색에 빠져 사람을 죽임이 날마다 심해지니 백성들이 원망하였다. 우왕
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여러 장수에게 금과 은으로 만든 술그릇을 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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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홍무(洪武) : 중국 명(明)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연호(1368~1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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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실록』권1, 총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