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사 곽여(郭璵, 1058~1130)는 예종
이 태자로 있을 때 곁에 있던 관원이었다. 예종
이 즉위하자 벼슬을 내놓고 멀리 가버렸다. 임금이 도성 동쪽의 약두산(若頭山) 한 봉우리를 하사하였다. (그는) 여기에 별장을 짓고는 이름을 ‘동산재(東山齋)’라 하였다. 그는 항상 오건(烏巾)
를 입고 궁중에 출입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이 그를 일러 ‘금문우객(金門羽客)
'예종' 관련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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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건
에 학창의(鶴氅衣)1)
1)
소매가 넓고 뒤 솔기가 갈라진 흰옷의 가를 검은 천으로 넓게 댄 윗옷.
궁궐에 출입하는 도사
’이라 했다. 일찍이 궁궐 내에서 열린 잔치에서 임금이 머리에 꽂는 꽃 한 가지를 내리고는 시를 지어 올리도록 하였다. 그 시에 이르기를
“누가 주홍빛 비단을 잘라 모란을 만들었는가.
꽃봉오리가 열리지 않은 것은 봄추위를 겁내서이다.
어쩐 일로 궁궐의 꽃이 도사의 관에 올랐을까?”
또 어가를 따라 장원정(長源亭)에 갔는데 임금이 누각에 올라 석양을 바라볼 때 들판에 한 늙은이가 소를 타고 개울을 따라 돌아가는 자가 있었다. 곧 명을 내려 구점(口占)
시를 종이에 쓰지 않고 즉석에서 읊조리는 것
하라 하니 “태평한 표정으로 제멋대로 소를 타고
부슬부슬 내리는 비에 반쯤 젖어 언덕머리를 지나가네.
집이 물가에 가까이 있음을 알겠으니
석양에 흐르는 냇물을 따라감을 그대로 두어라”
라 하였다. 어찌 선풍도(仙風道)를 담은 운치만이 임금의 뜻을 움직였겠는가. 문장 또한 굳세고 민첩함이 매우 뛰어나니 임금의 대우가 더욱 남달라 다른 신하들이 미칠 바가 아니었다.
임금이 일찍이 북문을 나와 환관 수십 명을 거느리고 종실열후(宗室列侯)라 스스로 일컬으며 동산재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마침 처사가 성에 들어가 머물면서 돌아오지 않으니 임금이 서너 차례 배회하면서 ‘하처난망주(何處難忘酒)
당나라 백거이가 쓴 시의 이름으로 “어느 곳이든 술을 잊기는 어렵도다”라는 뜻
’란 시를 써서 친히 동산재 벽에 붙이고 돌아왔다. 당시 사람들은 모두 말하길, 한 무제의 시인 ‘백운’과 당 태종의 무봉(舞鳳)의 필체를 겸한 것으로 고금에 없는 바라 하였다. 그 시에 이르길,
“어느 곳이든 술을 잊기는 어렵도다.
신선을 찾다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네.
서재의 창가는 저녁 햇살로 밝은데,
향(香)은 타고 재만 남아있네.
방장(方丈)은 아무도 지키는 사람 없고
신선의 집 문은 종일토록 열려만 있네.
동산의 꾀꼬리는 늙은 나무에서 울고
뜰에서 놀던 학은 우거진 이끼 위에서 잠들어 있네.
신선의 도를 누구와 얘기하리.
선생은 가고 오질 않네.
깊이 생각하니 탄식의 마음이 생겨
머리를 돌리면서 거듭 배회만 하네.
붓을 잡고 시를 써 벽에다 붙이고
난간을 잡고 느릿느릿 대에서 내려오네.
시 읊조림을 도와주는 경치는 많고
부딪치는 곳마다 세속의 티끌은 끊어졌네.
더운 기운은 수풀 아래로 잦아들고
훈풍은 집 모퉁이로 들어오네.
이러한 때 한 잔 술이 없으니
번잡한 근심을 어떻게 씻으리오.”
『파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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