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채와 괘배
원(元)나라 사람 양윤부(楊允孚)의 시에,
고려 생채 중 맛 좋은 생채를 다시 이야기하니
향기로운 새박 나물과 줄 나물을 모두 수입해 들여 온다.
하고, 스스로 주석하기를, ‘고려 사람은 생채 밥을 쌈에 싸서 먹는다.’고 하였다. 우리나라 풍속은 지금까지도 오히려 그러해서 채소 중에 잎이 큰 것은 모두 쌈을 싸서 먹는다. 그 중 상추쌈을 제일로 여기고 집집마다 심으니, 이는 쌈을 싸 먹기 위해서이다.
장광필(張光弼)이 궁중의 풍경을 읊은 시에도,
궁중의 옷차림은 고려의 모습을 새로 숭상하여서
방령은 허리에 지나가건만 어깨는 반밖에 덮이지 않는다.
하였다. 지금 풍속에도 오히려 이런 제도가 있는데, 길이는 무릎까지 닿지 않고 넓이는 어깨까지 닿지 않는다. 양쪽 옷자락은 서로 싸이지 않고, 방령은 겨우 마주 닿는 것이 학창(鶴氅)
학의 털로 만든 웃옷으로, 소매가 넓고 끝을 검은색 비단으로 꾸몄음
처럼 생겼다. 양쪽 옆으로는 구슬과 가락지를 달아서 마주 끼우게 되어 있는데, 옷 이름을 괘배(掛背)라고 한다. 장광필의 시에서 말한 것이 이 괘배인데, 풍속으로 되어 전해 온 지가 이미 오래다. 요즈음 이 괘배를 도복(道服) 위에다 덮어 입는 이도 더러 있다. 추측건대 고려 시대에도 역시 이와 같이 했고 원나라 사람은 이것을 본떠서 만들었던 듯하다.『성호사설』권5, 만물문 생채괘배
고려 원종(元宗)
때에 원(元)나라 세조(世祖)는 고려에서 요청한 여섯 가지의 일을 모두 허락했다. 그 중 한 가지가 의관은 고려의 풍속을 그대로 따르고 고치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충렬왕(忠烈王)
4년(1278)에 이르러서는 온 나라가 원나라 의복을 입게 되었다. 이때에는 재상으로부터 하급 관료까지 머리털을 바싹 깎지 않은 이가 없었다. 오직 궁궐 내에 있는 학관(學官)만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원종(元宗)' 관련자료
'충렬왕(忠烈王)' 관련자료
좌승지(左承旨) 박항(朴恒)이 집사관(執事官)을 불러 타이르자 이에 학생까지 머리털을 바싹 깎았으니, 이는 대개 원나라를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충숙왕(忠肅王)
때 이르러서는 원나라에서 정동행성(征東行省)을 세우고 국호를 없애려고까지 했는데, 굳이 간청한 결과 면하게 되었다. 또 우왕(禑王)
대에 이르러서는 원나라의 복장으로 고쳐 입었다. 추측건대 중간 얼마쯤은 고려 풍속에 따르다가 이때 와서 또 변했던 듯하니, 마땅히 다시 살펴보아야겠다.
'충숙왕(忠肅王)' 관련자료
'우왕(禑王)' 관련자료
『성호사설』권21, 경사문 호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