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 성은 이씨이고 이름은 승장이며 자는 질부(質夫)로, 상주(尙州) 경산부(京山府)
에서 공부했다. 재주와 학문이 박춘령(朴椿齡), 정지상(鄭知常, ?~1135)
과 이름을 나란히 하고, 을제
경상북도 성주군
사람이다. 아버지 이동민은 어릴 적에 계해(計偕)
지방에서 조정에 추천하는 선비를 회계 문서를 들고 가는 아전과 함께 서울로 보내는 일
와 함께 상경해 개경
'개경' 관련자료
'정지상(鄭知常, ?~1135)' 관련자료
乙第, 문과 33인의 합격자 중 4~10등 사이
에 급제하여 벼슬이 권지감찰어사에 이르렀다. 공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학문에 뜻을 둘 나이가 되자 의붓아버지가 집이 가난하다며 공부를 시키려 하지 않고 그 아들과 함께 일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어머니가 이를 반대하면서 "첩이 먹고 사는 것 때문에 수절하지 못했음을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 유복자가 다행히 학문에 뜻을 두고 있으니, 반드시 이 아이의 아버지가 본래 속해 있던 무리에 들어가 그 뒤를 따르게 하야 합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내가 무슨 얼굴로 지하에서 전남편을 다시 보겠습니까?"라고 말하며 마침내 그 뜻대로 용단을 내려 공을 솔성재(率性齋)
최충의 문헌공도 중 하나로 당시 최고의 사립 학교
에 입학시키니, 대개 전남편의 예전에 하던 일을 따르게 한 것이다. 공은 학문이 쌓이고 사물을 분별하는 재주가 날로 새로워져 크게 두각을 나타내게 되니 선비들이 모두 "이씨 가문이 아들을 잘 두었다"라고 하였다. 무자년(1168년, 의종
22) 봄에 시험에 응시하여 시대사성(試大司成) 김돈중(金敦中, ?~1170) 문하에서 진사시(進士試, 국자감
시)에 2등으로 합격하였다. 김돈중은 비록 문생(門生, 과거 합격자)에 속하게 된 것을 기뻐하였으나 수석으로 뽑히지 않은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러다가 그 해 가을 공이 급제한 뒤에야 기뻐하며 "내가 과거에서 인재를 얻었다는 것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의종' 관련자료
'국자감' 관련자료
……(중략)…… 무릇 선비로서 벼슬하려는 자가 만일 한림원(翰林院)이나 국자감(國子監)
중 한 자리를 얻게 되면 그의 재능이나 학문이 빛나지 않을 수 없으므로 (한림원이나 국자감
의 관직에 오르는 것을) 평생 영광으로 여겼다. 공은 봉산(蓬山)
을 두루 거치고, 몇 년 되지 않아 태자의 요좌(寮佐)로 옮겨 여러 차례 태자를 가까이에서 모셨으니, 관료로서 영예가 공과 같은 이가 없었다.
'국자감(國子監)' 관련자료
'국자감' 관련자료
신선이 사는 봉래산을 줄인 말로 궁궐을 의미함
의 한림원에서 시작하여 대학(大學)
'대학(大學)' 관련자료
『역주 고려묘지명집성』 상(김용선 편저,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1993), 이승장묘지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