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사학(私學)으로는 문종
때 태사중서령(太師中書令) 최충(崔沖, 984~1068)
이 후진들을 불러 모아 부지런히 가르치자 선비와 평민의 자제들이 모여들어 그 집 앞의 문과 거리를 가득 채웠다. 마침내 9재(九齋)
로 나누어 그 명칭을 낙성(樂聖)⋅대중(大中)⋅성명(誠明)⋅경업(敬業)⋅조도(造道)⋅솔성(率性)⋅진덕(進德)⋅대화(大和)⋅대빙(待聘)이라 했는데, 이를 일컬어 시중최공도(侍中崔公徒)
라고 불렀다. 과거에 응시하는 양반 자제들은 반드시 먼저 공도에 들어가 공부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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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여름철에는 절간을 빌려서 여름 수업을 했는데, 생도 가운데 급제하여 학문과 재능이 뛰어나지만 아직 벼슬하지 못한 사람을 선택해 교도(敎導)로 삼았다. 학습 내용은 9경(九經)
의 명부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으니, 이들을 최문헌 공도
라고 불렀다.
주역⋅상서⋅모시⋅예기⋅주례⋅의례(혹은 효경)⋅춘추좌씨전⋅공양전⋅곡량전
과 3사(三史)
사기⋅한서⋅후한서
였다. 간혹 선배가 찾아오면 촛불에 금을 그어 시 짓는 내기를 한 후, 그 순위를 내걸고 이름을 불러 들어오게 하여 술자리를 베풀었다. 미성년과 관례를 마친 성년이 좌우로 줄을 지어서 술상을 받드는데, 나아가고 물러남에 예의를 지키고 나이 많은 사람과 적은 사람 간에 차례와 순서를 지켰다. 날이 저물도록 시를 주고받으니 보는 사람들이 모두 칭송하고 감탄하였다. 그 후부터는 과거에 응시하는 사람들이면 모두 9재(九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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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유신(儒臣)
를 함께 세상에서 12도
라 불렀는데, 그 중 문헌공도
가 가장 흥성하였다.
유학에 조예가 깊은 신하
으로서 공도(公徒)를 세운 자가 11명 있었는데, 홍문공도(弘文公徒)는 시중 정배걸(鄭倍傑)이 세운 것으로 웅천도(熊川徒)라고도 하며, 광헌공도(匡憲公徒)는 참정(參政) 노단(盧旦, ?~1091), 남산도(南山徒)는 좨주(祭酒) 김상빈(金尙賓), 서원도(西園徒)는 복야(僕射) 김무체(金無滯), 문충공도(文忠公徒)는 시중 은정(殷鼎), 양신공도(良愼公徒)는 평장(平章) 김의진(金義珍, ?~1070) 혹은 낭중(郞中) 박명보(朴明保), 정경공도(貞敬公徒)는 평장(平章) 황영(黃瑩), 충평공도(忠平公徒)는 유감(柳監), 정헌공도(貞憲公徒)는 시중(侍中) 문정(文正, ?~1093), 서시랑도(徐侍郞徒)는 서석(徐碩)이 세운 것이다. 구산도(龜山徒)는 누가 세웠는지 모른다. 이들을 문헌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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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권74, 「지」28 [선거2] 학교
최충
의 자는 호연(浩然)이며 해주(海州)
8년(1005)에 과거에 장원 급제하고 현종
때는 습유(拾遺), 보궐(補闕), 한림학사(翰林學士), 예부시랑(禮部侍郞), 간의대부(諫議大夫)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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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남도 해주시
대령군(大寧郡) 사람이다. 그는 풍채가 훌륭하고 지조가 굳고 올곧았으며,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글을 잘 지었다. 목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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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문종
) 7년(1053)에 최충
이 나이가 70이 되었으므로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요청하자 왕이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렸다. “시중(侍中)
은 여러 대에 걸친 유학의 으뜸이자 삼한(三韓)의 덕을 이룬 사람이다. 지금 비록 늙었다고 물러나기를 청하나 차마 허락할 수 없다. 마땅히 해당 부서에서는 옛 법도를 살펴 궤장(几杖)
⋅상주국(上柱國)을 더해 주어 벼슬을 마치게 했다가, 얼마 후에 내사령을 더하고서야 벼슬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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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서문하성의 최고 관직으로 종1품 수상
최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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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로한 대신들에게 하사하는 몸을 기대는 방석과 지팡이로, 받는 사람에게 큰 영예로 여겨짐
을 내려주고 나라 일을 보게 해야 할 것이다.” 다시 추충찬도협모동덕치리공신(推忠贊道協謀同德致理功臣) 칭호와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수태사(守太師) 겸 문하시중(門下侍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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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권95, 「열전」8 [제신] 최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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