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종
) 4년(1109) 7월 국학
에 7재를 두었는데 『주역(周易)』전공을 여택(麗澤), 『상서(尙書)』를 대빙(待聘), 『모시(毛詩)』를 경덕(經德), 『주례(周禮)』를 구인(求仁), 『대례(戴禮)』를 복응(服膺), 『춘추(春秋)』를 양정(養正), 무학(武學)을 강예(講藝)라 하였다. 대학에서 최민용(崔敏庸) 등 70명과 무학(武學)에서 한자순(韓自純) 등 8명을 시험으로 뽑아, 여기에 나누어 공부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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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1114) 2월에 국자감
학생 장자(張仔) 등 60명이 궁궐에 가서 국학을 세울 것을 청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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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1116) 4월에 명하기를 “문무(文武)의 두 가지 학문은 국가 교육의 근원이므로 일찍이 이를 담당하는 학교를 각각 세워 학생들을 양성해 장래의 장수와 재상의 등용에 대비하라고 명했으나, 일을 맡은 자들이 각각 다른 의견을 고집하여 아직 결정하지 못하였다. 마땅히 빨리 결정하고 시행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14년(1119) 7월에 국학
에 처음으로 양현고(養賢庫)
를 두고 인재를 양성하게 하였다. 국초부터 문선왕묘(文宣王廟)
에 세우고 관리를 두고 스승을 배치했으며, 선종(宣宗)
때에 이르러서는 교육을 실시하려 했으나 미처 실행하지 못하였다. 예종
이 유학 교육에 열의를 가져 담당 관리에게 조서를 내려 학교를 크게 세우도록 하고, 유학에 60명과 무학에 17명을 두고 가까운 신하들에게 그 사무를 감독하게 했으며 유명한 유학자를 골라 학관(學官)과 박사(博士)로 임명하고 경서의 뜻을 강론하여 그들을 가르치고 지도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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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현고(養賢庫)' 관련자료
공자의 사당
를 국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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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권74, 「지」28 [선거2] 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