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축년(1589) 10월 2일 황해감사
한준(韓準)의 비밀 장계가 들어왔다. 이날 밤 삼정승, 육승지, 의금부 당상관
들을 급히 들어오게 하고, 다시 숙직에 들어온 총관, 옥당 상⋅하번들도 모두 입시하도록 명하였는데, 검열 이진길(李震吉)만은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임금이 비밀 장계를 내려서 보이니, 그것은 안악 군수 이축(李軸), 재령 군수 박충간(朴忠侃), 신천 군수 한응인(韓應寅) 등이 역적 사건을 고변(告變)한 것이었다. 그 내용은, 수찬을 지낸 전주에 사는 정여립(鄭汝立)
이 모반하여 괴수가 되었는데, 그 일당인 안악에 사는 조구(趙球)가 밀고한 것이었다. 즉시 의금부도사를 황해도와 전라도에 나누어 보내고 이진길을 의금부에 가두게 하였다. 진길은 곧 여립의 생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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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정록』⋅『일월록』⋅『조야기문』⋅『계갑일록』】
정여립
의 아버지 정희증(鄭希曾)은 대대로 전주 남문 밖에서 살아왔다. 처음 정여립
을 잉태할 때에 꿈에 정중부(鄭仲夫)가 나타났고, 날 때에도 또 같은 꿈을 꾸었다. 친구들이 와서 축하하였으나 그는 기뻐하는 빛이 없었다. 나이 7, 8세에 여러 아이와 놀면서 까치 새끼를 잡아 주둥이로부터 발까지 뼈를 부러뜨리고 살을 찢었다. 정희증이 이를 보고, “누가 이렇게 못된 짓을 했느냐”고 물으니 한 여종이 먼저 사실대로 대답하자 정희증이 노하여 정여립
을 크게 꾸짖었다. 그날 밤 정여립
이 종아이의 부모가 방아 찧으러 나가고 아이 혼자 자고 있는 것을 보고 들어가서 칼로 배를 갈라 죽였다. 그 부모가 돌아와서 보니 자리에 피가 가득하고 아이는 죽어 있었다. 발을 구르면서 통곡하니 이웃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어 시장바닥 같았다. 그때 정여립
이 어두운 구석에 숨어 있다가 나오면서, “내가 한 짓이니 괴이하게 여기지 마라” 하고 조금도 기가 꺾이지 않았다. 듣는 이가 해괴하게 여기고 혹은 말하기를, “악장군(惡將軍)이 났다”라고 하였다. 그 뒤에 정여립
의 나이 15, 16세가 되었을 때 그 아버지 정희증이 현감이 되었는데, 정여립
이 따라가서 한 고을 일을 전부 제 마음대로 처단하니, 아전들은 정여립
의 말만을 따르게 되자 정희증이 혀만 찰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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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구(金溝)에서 장가를 들어 그곳에서 살았고 과거
에 급제하였지만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서 글 읽기에 힘쓰니, 이름이 전라도 일대에 높이 나서 죽도(竹島) 선생이라고 일컫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성질이 흉악하여 형제가 5, 6명이나 되어도 다 서로 용납하지 못하고 안팎의 친척들이 원수가 되지 아니한 이가 없었다. 이웃에 사족(士族)
의 청상과부가 있었는데 재산이 많고 재가할 뜻이 없었다. 정여립
이 그 집안이 강도와 연결되었다고 관청에 무고하여 그 집 노비
를 잡아 가두게 하고 밤을 틈 타 과부를 강간하여 마침내 첩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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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정록』】
적신(賊臣) 정여립
은 널리 배우고 많이 기억하여 경전(經傳)을 통달하였으며 의논이 과격하며 언변이 뛰어났다. 이이(李珥)
가 그 재간을 기특하게 여겨 맞이하고 소개하여 드디어 청현직에 올려서 이름이 높아졌는데, 이이
가 죽은 뒤에 정여립
은 도리어 그를 비방하니 임금이 미워하였다. 이에 정여립
은 벼슬을 버리고 전주에 돌아가 나라에서 여러 번 불러도 나가지 않고, 향곡(鄕曲)에서 세력을 키우며 조심히 반역을 도모하다가 일이 발각되자 자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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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李珥)' 관련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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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계기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