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기(成均館記), 성간(成侃)
우리 태조
께서 즉위하신 아무 해에 국학(國學)
을 동북의 구석에 설립하였는데, 그 경영⋅설계와 규모⋅제도가 모두 마땅하게 되어 하나도 완전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대략을 들면 남으로 묘(廟)를 만들고 묘의 좌우에 무(廡)를 두어 묘에는 선성(先聖)
의 옥(屋)이 대소를 합하여 무릇 96칸인데, 유독 이 당이 성묘(聖廟)
와 더불어 가장 높아서 치목(治木)도 정하고 구조도 견고하며, 우뚝하고 높으며 찬란하고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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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을 제사하고, 무에는 선사(先師)
공자의 제자인 안회(顔回)
를 제사하는 것이 나라의 옛 전통이다. 동에 정록소(正錄所)를 만들고, 그 남으로 주방을 만들고, 또 그 남으로 식당을 만들고, 묘(廟)의 북쪽 양옆으로 장랑(長廊)을 만들고, 낭(廊)의 북쪽에 그 터를 돋우어 좌우로 협실을 두고, 중간은 청을 만들어 선생과 제자가 강학하는 장소를 만들었으니, 이를 명륜당(明倫堂)이라 이른다. 성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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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관(學官)은 대사성(大司成) 이하 무릇 몇 사람인데, 이른 아침에 북을 울리어 제생(諸生)을 불러 뜰아래 도열시키고, 한 번 읍한 다음에 이 당에 올라 경(經)을 가지고 논란하며, 군신(君臣)의 도를 강론하고, 부자(父子)의 도를 강론하며, 장유(長幼)의 도를 강론하고, 부부(夫婦)와 붕우(朋友)의 도를 강론하여, 익혀서 익숙하게 하고, 경계하고 격려하며, 움직이고 쉬는 때를 따라서 조이고 늦추어, 날로 진보하게 하고 달로 젖게 하여 연마해서 변화하게 하니, 훗날에 장차 나라에 충신이 되고 집안에 효자가 될 자가 반드시 쏟아져 나올 것이니 아, 거룩한 일인 동시에 우리 동방에 일찍이 없던 일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성인의 가르침이 또한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유독 명륜(明倫)으로써 이 당을 이름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라고 하니, 답하길, “부자나 군신이나 부부나 장유나 붕우의 사귐은 본래 천리(天理)의 당연한 것으로써 천지가 다하도록 시종을 같이하는 것이니, 사람으로서 할 일이 어찌 이보다 더 큰 것이 있겠는가. 학당을 하(夏)나라는 교(校), 상(商)나라는 서(序), 주(周)나라는 상(庠)이라 하였는데 모두 이 윤리를 밝히자는 것에 불과하다. 인륜이 위에서 밝아지면 서민이 아래에서 친하게 되는 것이다. 공자는 대성인이시니 몇 길이나 되는 성인의 담장 안문에 들어가는 자가 또한 적었다.
그러나 그 성인이 된 이유를 찾아보면 능히 인륜을 다한 것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성인은 인륜의 지극한 것이다. ”라고 하였으니, 이는 규구(規矩)
으로써 허물어지고 노장(老莊)으로써 음탕해져 인륜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였고, 자구의 해석에만 얽매이는 훈고(訓詁)의 학문과 문자의 수식에만 신경 쓰는 사장(詞章)의 학문으로써 인륜이 전혀 밝혀지지 못하였으니 동물과 다른 것이 거의 드물다.
지름이나 선의 거리를 재는 도구
가 방형과 원형에 극진하여 털끝만큼도 더 깎아 낼 수 없는 것과 같다. 진(秦)⋅한(漢) 이래로 바른 학문이 전해지지 않아 신한(申韓)1)
1)
신은 신불해(申不害)라는 사람으로 중국 전국시대 정(鄭)나라 사람이고, 한(韓)은 한비자(韓非子)라는 사람으로 역시 전국시대 한(韓)나라 사람이다. 이 두 사람 모두 형법학(刑法學)의 창시자들이다.
아, 애석한 일이 아니겠는가. 지금 이 당에 놀고 이 당에 오르내리는 자는 그 이름을 보면 그 뜻을 알아야 하며, 한갓 그 뜻만 알 것이 아니라 또한 그 실제를 이행하여, 성조(聖朝)의 장육(長育)하는 뜻을 저 버림이 없게 하면 이로써 되는 것이다. 그 공부의 절차로 말하면 비록 한마디 말로 다할 수 없으나, 같은 유에 미루어 나간다면 또한 이 당의 안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상우(上宇)와 하동(下棟)은 높음으로써 낮은 데에 임한 것이고, 어둠을 등지고 밝음을 향한 것은 안과 밖을 구별한 것이고, 문으로부터 당으로, 당으로부터 아랫목으로 가게 한 것은 등위(等威)를 무시해서는 안 되고 동서(東西)의 구분에 희미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구하면 거의 얻게 될 것이다.”
성균관
은 오로지 교훈(敎訓)을 관장하는 곳으로 국가에서 양현고(養賢庫)를 설치하여 관관(館官)으로서 이를 겸하게 하고, 항상 유생(儒生) 200명을 양성하였다. 상당부원군 한명회(韓明澮)
는 임금께 아뢰어 존경각(尊經閣)을 지어 경전을 많이 간행하여 여기에 두었고, 광천군 이극증(李克增)은 임금께 아뢰어 전사청(典祀廳)을 세웠으며, 나도 또한 임금께 아뢰어 향관청(享官廳)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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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에 성전(聖殿)의 동서무(東西廡)와 식당을 개축하고, 베 500여 필과 쌀 300여 석을 내리셨으며, 또 학전(學田)을 내리셔서 이것을 성균관
의 수용에 충당하게 하였는데, 이극증이 아뢰기를, “이제 성은을 입사와 쌀과 옷감을 많이 받았사오나, 비옵건대, 술과 음식을 갖추어 조정의 문사와 여러 유생을 모아 사문(斯文)의 성사(盛事)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니, 성묘(成廟, 성종)
께서 윤허하여서 이때 문사들이 명륜당에 크게 모였다. 찬거리가 극히 정갈하였고, 승지가 궁중의 좋은 술과 어주(御廚)에 있는 맛있는 음식을 주어, 사람과 말의 왕래가 잇닿아 끊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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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축년(1433, 세종
15) 가을에는 성균관
에 거둥하시어 선성(先聖)과 선사(先師)에게 제사 드리고 하연대(下輦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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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연(輦)을 멈추고 내리던 대(臺)를 말함
에다 장전(帳殿)
임시로 꾸민, 임금이 앉는 자리
을 마련하였다. 문신과 재신(宰臣)⋅추신(樞臣)은 장전 내에 입시하고, 당하관인 문신들은 뜰에 줄을 지어 앉았으며, 8도의 유생이 서울에 운집하니, 무려 수만 명이나 되었다. 상하가 모두 꽃을 꽂고 연회석에 참석하였으며, 새로 지은 악장(樂章)으로 연주하여서 이를 권하였고, 각 관청이 나누어 음식을 장만하였다. 성상께서 자주 내신(內臣)을 보내어 이를 살피시어 사람들이 모두 취하도록 마시게 하고 배불리 먹도록 하였으니, 옛날의 사례에 없던 일이었다. 『대동야승』권1, 「용재총화」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