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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가 천하를 차지한 지 100년이 지났지만 그 자녀와 벼슬아치들이 나온 바와 궁실⋅배⋅수레⋅농경의 법과 최(崔)⋅노(盧)⋅왕(王)⋅사(謝)씨 등의 사대부
씨족들이 그대로 있으니 여기에 있는 사람들을 모조리 오랑캐라 하고 중국의 법마저 폐기해 버린다면 크게 옳지 못하다. 진실로 백성에게 이롭기만 한다면, 그 법이 비록 오랑캐에게서 나왔다 하더라도 성인은 장차 취할 것이다. 하물며 본래부터 중국 법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지금 청나라는 진실로 오랑캐족이다. 오랑캐족으로 중국 땅을 차지하는 것이 이롭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끝내 중국 땅을 빼앗았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중국을 빼앗은 오랑캐족만을 알고 있을 뿐, 빼앗김을 당한 것이 중국이란 사실을 모른다. 이 때문에 스스로 지키기에도 힘이 부족했으니 이미 겪어 본 경험이 있다. 세상에서 전하길 정축년의 맹약
은 끝내 오랑캐 복으로 갈아입고 동쪽 오랑캐를 크게 격파하였으니 옛날의 영웅은 반드시 복수하고자 하는 뜻을 품었으면 오랑캐의 복장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중국의 법으로 배울 만 하다라고 이야기하면 무리로 일어나 비웃는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도 원수를 갚으려면 원수가 차고 있는 예리한 칼을 빼앗으려고 한다. 그런데 이제 당당한 국가로 천하에 대의를 펴려고 하면서 중국 법을 한 가지도 배우지 않고 중국 선비를 한 사람도 사귀지 않는다. 이리하여 (북벌은) 우리 백성만 수고로울 뿐 효과가 나타나지 않으며 곤궁과 기아에 빠져 스스로 폐지하게 하였다. 백배나 되는 이익을 버리고 실행하지 않으니, 나는 중국에 있는 오랑캐들을 몰아내기는커녕 우리나라의 문명하지 못한 풍속마저 완전히 탈피하지 못할까 염려한다.
'사대부' 관련자료
병자호란 마지막 해인 정축년(1637)에 맺은 삼전도의 맹약
때 청나라의 칸[汗]
청 태조 누르하치(努爾哈赤, 재위1616~1626)
이 우리 조선을 오랑캐로 복속시키고자 하였으나 구왕(九王)
청 태조 누르하치의 열네 번째 아들 예친왕(睿親王) 도르곤(多爾袞, 1612~1650)
이 간하여 말하길 ‘조선은 요동 지역에 있어 폐부와 같은 곳입니다. 지금 만약 그 의복을 섞어서 출입하게 한다면 천하가 평온하지 않고 일이 어찌될 지 알 수 없습니다. 예전과 같이 함만 못하니 이는 가두지 않고도 가두어 두는 것입니다. ’ 칸이 말하길 ‘좋다’하고는 마침내 그만두었다. 우리 입장으로 봐서는 다행이라면 다행이겠지만 저들의 계책으로 본다면 우리가 중국과 통하지 못함을 이롭게 여긴 데에 불과할 뿐이다. 옛날 조(趙)나라 무령왕(武靈王)1)
1)
중국 전국시대 조(趙)나라의 왕이다. BC 307년 그는 연(燕), 동호(東胡), 진(秦), 한(韓) 등과 마주한 변경을 지키기 위해 군사력 강화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호복(胡服)을 도입하였다. 당시 전통적인 전술은 세 명의 병사가 마부, 활쏘기, 창을 분담하던 전차전의 방식이었다. 반면 북방 유목 민족은 훈련된 전사 한 명이 말을 타고 달리면서 활을 직접 쏘는 전법을 사용하였는데, 당시 대부들이 입던 소매와 밑단이 긴 옷은 말을 타기에 불편하였으므로 유목 민족 방식의 기병을 양성하려면 길이가 짧은 호복의 도입이 필요하였다. 조정 신료들은 오랑캐의 옷이라 하여 반대하였으나, 무령왕은 계속 설득하여 호복(胡服)을 도입하기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오랑캐를 물리치려고 한다면 먼저 누가 오랑캐인가를 알아야 하며, 중국을 높이려면 그들의 유법을 모두 실행하는 것이 더욱 중국을 높이는 것이 된다. 명나라를 위해 원수를 갚아 주고 우리의 부끄러움을 씻으려면 20년 동안 힘껏 중국을 배운 다음, 함께 의논하여도 늦지 않을 것이다.
『북학의
'북학의' 관련자료
- 중국 전국시대 조(趙)나라의 왕이다. BC 307년 그는 연(燕), 동호(東胡), 진(秦), 한(韓) 등과 마주한 변경을 지키기 위해 군사력 강화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호복(胡服)을 도입하였다. 당시 전통적인 전술은 세 명의 병사가 마부, 활쏘기, 창을 분담하던 전차전의 방식이었다. 반면 북방 유목 민족은 훈련된 전사 한 명이 말을 타고 달리면서 활을 직접 쏘는 전법을 사용하였는데, 당시 대부들이 입던 소매와 밑단이 긴 옷은 말을 타기에 불편하였으므로 유목 민족 방식의 기병을 양성하려면 길이가 짧은 호복의 도입이 필요하였다. 조정 신료들은 오랑캐의 옷이라 하여 반대하였으나, 무령왕은 계속 설득하여 호복(胡服)을 도입하기는 데 성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