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 안용복은 동래부(東萊府) 전선(戰船)에 예속된 노군(櫓軍)이니, 왜관
에 출입하여 일본어에 능숙하였다. 숙종(肅宗)
19년 계유 여름에 풍랑으로 울릉도에 표류했는데, 왜선 7척이 먼저 와서 섬을 다투는 분쟁이 일고 있었다. 이에 안용복이 왜인들을 꾸짖으니 왜인들이 화가 나서 안용복을 잡아 가지고 오랑도(五浪島)로 돌아가 구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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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용복이 오랑도 도주에게 “울릉(鬱陵)과 우산(芋山)은 원래 조선에 예속되어 있으며, 조선은 가깝고 일본은 먼데 어찌 나를 구금하고 돌려보내지 않는가?” 하니, 오랑도 도주가 백기주(伯耆州)로 보냈다. 이에 백기도주(伯耆島主)가 빈례(賓禮)로 대우하고 많은 은자(銀子)를 주니 모두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백기도주가 “그대가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니 안용복이 전후 사실을 말하고 이르기를, “침략을 금지하여서 이웃 나라끼리 친선을 도모함이 소원이다. ”라고 하니,
백기도주가 이를 승낙하고 강호 막부(江戶幕府)에 보고하여 계권(契券)을 출급하고 돌아가게 하였다.
이에 출발하여 장기도에 이르니 장기도 도주가 대마도
와 부동(符同)하여 그 계권을 빼앗고 대마도
로 압송하였다. 대마도
주가 또 구금하고 강호 막부로 보고하니, 강호에서 다시 서계를 보내고 울릉과 우산 두 섬을 침략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또 본국으로 호송하라는 지령이 있었다. 그런데 대마도
주는 다시 그 서계를 빼앗고 50일을 구금하였다가 동래부 왜관
으로 보냈는데, 왜관
에서 또 40일을 머물게 했다가 동래부로 돌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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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안용복이 동래 부사에게 이 사실을 모두 호소하니, 부사가 상부에 보고하지도 않고 월경(越境)한 일로 2년의 형벌을 내렸다. 을해(1695, 숙종
21) 여름에 안용복이 울분을 참을 수 없어 떠돌이 중 5인과 사공(沙工) 4인과 배를 타고 다시 울릉도에 이르니, 우리나라 상선 3척이 먼저 와서 정박하고 고기를 잡으며 대나무를 벌채하고 있었는데, 왜선이 마침 당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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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용복이 여러 사람을 시켜 왜인들을 포박하려 했으나 여러 사람이 두려워하여 따르지 않았으며, 왜인들이 “우리들은 송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다가 우연히 이곳에 왔을 뿐이다” 하고 곧 물러갔다. 안용복이, ‘송도도 원래 우리 우산도다.’라 하고 다음 날 우산도로 달려가니, 왜인들이 돛을 달고 달아나거늘 안용복이 뒤쫓아 옥기도(玉岐島)로 갔다가 백기주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백기도 도주가 나와 환영하거늘, 안용복이 울릉도 수포장(搜捕將)이라 자칭하고 교자를 타고 들어가 도주와 대등한 예로 대하고 전후의 일을 소상히 말하였다.
그리고 또 “우리나라에서 해마다 쌀 1석에 반드시 15두요, 면포
1필은 35척이며, 종이 1권에 20장으로 숫자를 충당해서 보냈는데, 대마도
에서 빼먹고 쌀 1석은 7두, 면포
1필에 20척, 종이는 3권으로 줄여서 강호로 올려 보냈으니, 내가 장차 이 사실을 관백(關白)에게 곧장 전달하여 그 속인 죄상을 다스리게 하겠소” 하고 동행한 사람들 가운데 문자에 능통한 자를 시켜 소장을 지어 백기도 도주에게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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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주의 부친 된 자가 이 말을 듣고 백기주에 달려와 용서해 주기를 애걸하므로 그 일은 이로써 결말을 지었다. 그리고 과거의 일을 사과하고 돌려보내며, “섬을 가지고 다툰 일은 모두 그대의 말대로 준행할 것이오. 만약 이 약속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중벌에 처하겠소”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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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秋) 8월에 양양에 다다르니, 방백(方伯)
이 이 사실을 장계로써 보고하고 안용복 등 일행을 서울로 압송하였다. 여러 사람의 공초가 한결같이 나오니 조정의 의론이 월경하여 이웃 나라와 쟁단을 일으켰다 하여 장차 참형에 처하려 하였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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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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