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법은 「예천명(醴泉銘)
위징(魏徵)이 짓고 구양순(歐陽詢)이 글씨를 쓴 비문
)」이 아니면 손을 들여 놓을 수가 없다. 이미 조이재(趙彝齋)
남송 후기의 서화가 조맹견(趙孟堅, 1199~1267)의 호(號)
때로부터 「예천명」을 해법(楷法)
해서(楷書) 쓰는 법
의 규얼(圭臬)
표준, 준칙, 모범
로 삼았으니 그때에 어찌 우군서(右軍書)
왕희지를 가리킴
의 『황정경(黃庭經)』⋅『악의론(樂毅論)』이 없었으랴마는 (친필이) 다 돌고 돌면서 변하고 잘못되어 준칙을 삼을 수가 없으니, 옛 석탑(石搨)에서 진본 글씨를 취하는 것만 못하다. 이 때문에 머리를 숙이고 「예천명」⋅「화도사비(化度寺碑)」 등 비석을 좇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화도사비」는 지금 원래의 비석은 없고 송나라 때 탑본한 범씨서루본(范氏書樓本) 같은 것은 우리나라 사람이 더욱 얻어 볼 수가 없다. 오히려 예천명의 원석 탑본이 그대로 남아 있으니, 설사 많이 낡고 부스러졌다 해도 이것이 아니면 종요(鍾繇, 151~230)
중국 삼국 시대 위(魏)나라의 대신, 서예가
와 삭정(索靖, 239~303)
중국 삼국 시대 위(魏)나라 명황제 때부터 서진(西晋)에 이르기까지 활동한 서예가
의 옛 법도를 거슬러 올라갈 수 없다. 어찌하여 이를 버리고 딴 것을 구한단 말이냐. 네가 말한 바 “겨우 두어 글자를 쓰면 글자 글자가 따로 놀아 마침내 하나로 귀결되지(歸一) 않는다. ”는 것은 곧 네가 입문하는 진보된 경지이다. 모름지기 마음을 가라앉히고 힘써 따라 꾹 참고 이 한 관문을 넘어서야만 쾌히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니, 절대 이것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서 물러나지 말고 더욱더 공덕을 쌓아 나가야 할 것이다. 나는 60년이 되어도 오히려 하나로 귀결되지 못하는데 하물며 너는 초학자가 아니더냐. 그러나 나는 너의 이 말을 들으니 매우 기쁘며 반드시 얻는 바가 이 한 마디 말에 있다고 생각한다. 절대 범연히 보고 부질없이 지내지 말아야 묘체가 된다.
예서(隷書)는 바로 서법의 조가(祖家)이다. 만약 서도에 마음을 두고자 하면 예서를 몰라서는 아니 된다. 그 법은 반드시 방경(方勁)
각지고 반듯하며 굳센 멋이 있음
함과 고졸(古拙)
기교는 없으나 예스럽고 우아한 멋이 있음
함을 높이 치는데, 그 고졸한 곳은 또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한나라 예서[漢隷]의 묘미는 오로지 고졸한 곳에 있다. 「사신비(史晨碑)」1)
는 진실로 좋으며 이 밖에도 「예기비(禮器碑)」⋅「공화비(孔和碑)」⋅「공주비(孔宙碑)」 등의 비가 있다. 그러나 촉도(蜀道)2)
의 여러 석각이 아주 예스러우니 반드시 먼저 이로 들어가야만 속된 예서체나 평범한 팔분체(八分體)3)
의 번드르르한 자태와 속된 기운을 없앨 수 있다. 더구나 예법은 가슴속에 청고고아(淸高古雅)
가 들어 있지 않으면 능히 팔 아래와 손끝에 발현되지 않으며, 또 심상한 해서 같은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모름지기 가슴속에 먼저 문자향과 서권기를 갖추는 것이 예서 쓰는 법의 근원이며, 예서를 쓰는 신묘한 비결(神訣)이 된다.
1)
후한 시대인 169년에 세운 비이다. 노(魯)나라의 승상 사신(史晨)이 공자묘
에 성대하게 제사를 지낸 것을 기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공자묘' 관련자료
2)
중국 삼국시대 촉나라의 영토였던 촉(蜀) 땅, 곧 지금의 쓰촨성(四川省)으로 통하는 험준한 길을 말한다.
3)
예서(隷書)의 한 종류로서 예서(隷書)에서 2분, 소전(小篆)에서 8분을 취하여 만든 서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서의 복잡함이 상당 부분 해소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본래 예서가 특정 인물이 창작한 것이 아니라 진나라의 하급 관리들이 문서 기록의 효율성을 위해 전서의 복잡함을 간략하고 직선적인 형태로 수정하면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본다. 진나라 때부터 전한 중기까지 목간(木簡)에 자주 보이는 초기의 예서는 계속 글자가 정리되고 수정되어 후한의 팔분체가 되었다. 팔분체가 이전의 예서와 다른 점은 글자의 마지막 획을 삐침으로 표현하는 파책(波磔)이 생겼다는 점이다. 팔분체로 쓴 글자는 상하가 짧고 가로가 긴 예서의 특성에 파책이 더해지며 마치 여덟 팔(八) 자와 비슷한 모양을 띠는데, 팔분체라는 이름은 여기서 유래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맑고 고결하며 예스럽고 우아함
한 뜻이 들어 있지 않으면 손에서 나올 수 없고, 가슴속의 청고고아한 뜻은 또 가슴속에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4)
4)
‘문자의 향기’와 ‘서책의 기운’이라는 뜻으로, ‘좋은 책을 읽으면 기운이 솟는다’는 의미이다.
근일에는 조지사(曺知事)
같은 것은 촉도(蜀道)의 여러 석각 중에서도 매우 좋은 것이다.
조선 후기 문신, 서예가인 조윤형(曺允亨, 1725~1799)
, 유기원(兪綺園)
조선 후기 서예가 유한지(兪漢芝, 1760~1834)의 호(號)
같은 여러 사람들이 예서 쓰는 법에 깊다. 다만 문자기(文字氣)가 적은 것은 안타깝다.이원영(李元靈)
조선 후기 서예가이자 화가인 이인상(李麟祥, 1710~1760)의 자(字)
은 예법이나 화법이 다 문자기가 있다. 시험 삼아 이를 살펴보면 그 문자기가 있는 것을 해득할 수 있으니, 그런 뒤에 해야 할 것이다. 집에 소장한 예첩이 자못 구비되어 있으니 「서협송(西狹頌)」5)
5)
자연 암벽을 갈고 닦아 글씨나 그림을 새긴 마애(摩崖)의 하나이다. 중국 간쑤성(甘肅省) 룽난(隴南)에 있으며 한나라 예서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다.
우리나라의 난 그림은 대가 끊어져 오래도록 작가가 없었다. 다만 살펴보건대 우리 선묘(宣廟, 선조)
의 어화(御畫)는 하늘이 내린 솜씨로서, 잎 그리는 방식과 꽃의 품격이 정소남(鄭所南)
'선묘(宣廟, 선조)' 관련자료
남송 시대 활약한 중국 묵란화의 원조 격인 인물
의 방법과 흡사하다. 대개 그때 송나라 사람의 난초 그리는 법이 우리나라에 전해졌는데 역시 어화도 그를 옮긴 것이다. 정소남의 그림은 역시 중국에도 드물게 전하며 근래에 (작가들이) 익힌 것은 또 원(元)⋅명(明) 이후의 방법이다. 비록 그림에 능한 자는 있으나 반드시 다 난(蘭)에 능하지는 못하다. 난은 화도(畫道)에 있어 특별히 하나의 격을 갖추고 있으니, 가슴속에 서권기(書卷氣)를 지녀야만 붓을 댈 수 있는 것이다. “봄은 무르익어 이슬은 무겁고 땅은 따뜻하여 풀은 돋아나며 산은 깊고 해는 긴데 사람은 고요하고 향기는 뚫고 든다. ” 이 한 조(條)는 조이재의 말이다.
옛사람은 난초를 그리되 한두 장에 지나지 않았으며 일찍이 다른 그림같이 여러 폭을 연대어 만든 일이 없다. 이는 우격다짐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세간에서 난 그림을 요청하는 자들은 이 경지가 극히 어렵다는 것을 모르고서 혹은 많은 종이로, 심지어는 팔첩(八疊)을 무리하게 청하는 자도 있는데, 다들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사양한다.
『완당집』권7, 잡저, 서시우아
- 후한 시대인 169년에 세운 비이다. 노(魯)나라의 승상 사신(史晨)이 공자묘
'공자묘' 관련자료
- 중국 삼국시대 촉나라의 영토였던 촉(蜀) 땅, 곧 지금의 쓰촨성(四川省)으로 통하는 험준한 길을 말한다.
- 예서(隷書)의 한 종류로서 예서(隷書)에서 2분, 소전(小篆)에서 8분을 취하여 만든 서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서의 복잡함이 상당 부분 해소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본래 예서가 특정 인물이 창작한 것이 아니라 진나라의 하급 관리들이 문서 기록의 효율성을 위해 전서의 복잡함을 간략하고 직선적인 형태로 수정하면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본다. 진나라 때부터 전한 중기까지 목간(木簡)에 자주 보이는 초기의 예서는 계속 글자가 정리되고 수정되어 후한의 팔분체가 되었다. 팔분체가 이전의 예서와 다른 점은 글자의 마지막 획을 삐침으로 표현하는 파책(波磔)이 생겼다는 점이다. 팔분체로 쓴 글자는 상하가 짧고 가로가 긴 예서의 특성에 파책이 더해지며 마치 여덟 팔(八) 자와 비슷한 모양을 띠는데, 팔분체라는 이름은 여기서 유래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 ‘문자의 향기’와 ‘서책의 기운’이라는 뜻으로, ‘좋은 책을 읽으면 기운이 솟는다’는 의미이다.
- 자연 암벽을 갈고 닦아 글씨나 그림을 새긴 마애(摩崖)의 하나이다. 중국 간쑤성(甘肅省) 룽난(隴南)에 있으며 한나라 예서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