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화비를 서울의 큰 거리에 세우다
고종
3년 병인년(1866) 이래 대원군은 오로지 척양(斥洋)
의 의리만을 주장하여 천주교도 20여만 명을 죽였고 외국을 업신여겼으며 해안 곳곳에 포대를 구축하였다. 이때에 이르러서는 돌을 캐어 종로
【서울 중앙에 있는 거리이며, 종각을 짓고 큰 종을 달아 저녁을 알려 주었으므로 종가(鍾街)라고 불렀다】
에 비석을 세웠다. 그 비면에 글을 써서 이르기를,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즉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팔아먹는 짓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라고 하였다. 또 그 옆에 작은 글자로 두 줄을 썼는데, 첫째 줄에는, “우리 자손만대에게 경계하노라(戒我子孫萬年). ”라고 했고, 둘째 줄에는 “병인년에 비문을 짓고 신미년에 세운다(丙寅作, 辛未立).”라고 하였다. 뒷면에는 ‘위정척사
의 비(衛正斥邪之碑)’라고 썼다. 또 먹을 만드는 곳에 명령하여 먹의 표면에 열두 글자를 새겨 넣도록 하였으니,
【즉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의 글자이다】
, 먹 뒤쪽에는 ‘위정척사
의 먹(衛正斥邪之墨)’이라고 새겨, 사람마다 척화(斥和)
의 의리를 알도록 했다.
'고종' 관련자료
'척양(斥洋)' 관련자료
'위정척사' 관련자료
'위정척사' 관련자료
'척화(斥和)' 관련자료
후일 구미 각국과 통상하게 되자, 조정에서 논의하여 그 비석을 넘어뜨렸다. 그 비석이 이제는 종로 뒤 남쪽 작은 길의 다리가 되어 버렸는데, 그 글자가 비석의 뒷면에 있기 때문에 볼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