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
조선의 땅은 실로 아시아의 요충에 자리 잡고 있어서 형세가 반드시 싸우는 곳이 되니, 조선이 위태로우면 즉 동아시아의 형세가 날로 급해질 것이다. 러시아가 땅을 공략하고자 하면 반드시 조선으로부터 시작할 것이다. 아! 러시아가 범과 이리 같은 진나라처럼 정벌에 힘을 쓴 지 300여 년, 처음에는 유럽에 있었고, 다음에는 중앙아시아였고, 오늘날에는 다시 동아시아에 있어서 조선이 그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조선의 책략은 러시아를 막는 일보다 더 급한 것이 없을 것이다. 러시아를 막는 책략은 무엇인가. 중국과 친하고(親中國) 일본과 맺고(結日本), 미국과 연결(聯美國)함으로써 자강을 도모할 따름이다.
중국과 친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동·서·북쪽이 모두 러시아와 경계가 잇닿아 있는 것은 중국뿐이다. 중국은 땅이 크고 물자가 풍부하며, 그 형세가 아시아주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 까닭으로 천하에 러시아를 제어할 나라로는 중국만한 나라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중국이 사랑하는 나라로는 또한 조선만한 나라가 없다. 조선이 우리 번속(藩屬)이 된 지 이미 1000년이 지났다. 중국은 덕으로써 편안히 지내게 하고 은혜로써 품어줄 뿐, 한 번도 그 토지와 인민을 탐내는 마음을 가진 적이 없었음은 천하가 함께 믿는 바이다. 하물며 우리 대청(大淸)은 동쪽 땅에서 제국을 일으켜, 먼저 조선을 평정하고 후에 명나라를 정벌해서 200여 년 동안 덕으로 소국을 아꼈고 조선은 예로써 대국을 섬겨 왔다. 강희(康熙), 건륭(乾隆) 시대에는 무슨 일이든지 서로 묻지 않은 것이 없어서 내지(內地)의 군현과 다름이 없었다. 이는 문자가 같고, 정교(政敎)가 같고, 정의(情誼)가 친목할 뿐만 아니라, 또한 형세가 서로 접하여 북경
중국의 수도 베이징을 높여 부르는 말
을 껴안아 호위하는 것이 마치 왼팔과 같다.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고, 환란을 함께하였다. 저 베트남과의 소원한 관계나 미얀마처럼 저 멀리 떨어져 있는 것과 본래 몹시 차이가 있었다. 지난번 조선에서 일이 있을 때에는 중국은 어김없이 천하의 양식을 다 써버리고 천하의 힘을 다하여 싸웠다. 서양의 통례에 따르면, 양국이 전쟁할 때면 국외의 나라는 그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고 한편을 도와줄 수 없으나 다만 속국은 곧 예외이다. 오늘날 조선은 중국 섬기기를 마땅히 예전보다 더욱 힘써서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조선과 우리는 한 집안 같음을 알도록 해야 할 것이다. 대의가 밝혀지고 응원이 자연히 왕성해지면 러시아 사람은 그(조선의) 형세가 고립되지 않았음을 알고 조금은 돌아보고 꺼림이 있을 것이다. 일본 사람은 그 힘이 대적할 수 없음을 헤아리고 가히 더불어 연결하여 화친하고자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기필코 외국의 혼란은 슬며시 없어지고 나라의 근본은 더욱 견고해질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중국과 친하여야 한다는 것이다.일본과 맺어야 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중국 이외에 가장 가까운 나라는 일본뿐이다. 옛날 선왕이 사신을 보내어 통교(通交)한 나라는 맹부(盟府)1)
에 실려 있고, 그들은 대대로 맡은 일에 충실하였다. 근래에 이르러서는 즉, 북으로 승냥이와 호랑이가 어깨와 등을 걸쳐 타고 있어 만일 일본이 혹 땅을 잃으면 조선 8도가 능히 스스로 보전할 수가 없을 것이다. 조선에 한번 변고가 생기면 규슈(九州), 시코쿠(四國) 또한 일본이 차지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고로 일본과 조선은 실로 보거상의(輔車相依)2)
의 형세에 놓여 있다. 한(韓), 조(趙), 위(魏)가 합종(合縱)3)
하자 진이 감히 동쪽으로 내려오지 못하고, 오(吳)와 촉(蜀)이 서로 결합하자 위(魏)가 감히 남쪽으로 침략해 오지 못하였다. 저들이 강대한 이웃 나라의 핍박으로 순치(脣齒)4)
의 교분을 맺고자 하니, 조선으로서는 작은 거리낌을 버리고 큰 계책을 도모하여, 옛날의 우호를 닦고 외부의 지원과 결합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훗날 양국의 윤선과 철선이 일본의 바다 위에 종횡으로 누비게 되면 외국의 업신여김은 절로 들어올 길이 없어질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일본과 맺어야 하는 것이다.
1)
하늘에 맹세한 기록.
2)
이해관계가 깊음을 비유한 말. 수레의 덧방나무와 바퀴가 떨어질 수 없는 것처럼 서로 도와서 의지한다는 뜻
3)
한(韓), 조(趙), 위(魏)가 합종(合縱) : 중국 역사에서 B.C. 4세기 말에 접어들면서 진(秦)이 최강국으로 등장하여 여러 열국(列國)을 위협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동방에 있던 조(趙)·한(韓)·위(魏)·연(燕)·제(齊)·초(楚) 등 6국은 종적으로 연합하여 서방의 진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었다. 이를 합종이라 하며, 합종책을 주도한 사람은 소진(蘇秦)이었다. 후일 진나라는 합종책을 깨기 위해 연횡책(連衡策)을 구사하였다.
4)
입술과 이의 관계처럼 아주 밀접하여, 그 운명도 함께 한다는 뜻임
미국과 연결해야 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조선의 동해에서 가면 아메리카가 있는데, 즉 합중국이 도읍한 곳이다. 원래 영국의 속국이었는데 100년 전에 워싱턴이란 자가 유럽인의 학정을 받기를 원하지 않고 떨쳐 일어나 자립하여 한 나라로 독립하였다. 그 뒤 선왕의 유훈을 지켜서 예의로써 나라를 세우고 다른 나라의 토지와 인민을 탐내지 않고, 굳이 다른 나라의 정사에 간여하지 않았다. 중국과 조약을 맺은 지도 10여 년이 되었는데, 그동안 조그마한 분쟁도 없는 나라이다. 일본과의 왕래에 있어서는 통상을 권유하고, 군사 훈련을 권유하고, 조약을 고치도록 도와주었으니, 이는 천하만국이 모두 알고 있는 것이다. 대개 민주국이란 공화를 정체로 하기 때문에 남이 독점하는 것을 이롭게 여기지 않는다. 미국이 나라를 세운 초기에 영국 정부의 혹독한 학정으로 말미암아 떨쳐 일어났으므로 항상 아시아와 친하고 유럽과는 소원하나 인종은 사실 유럽과 같다. 그 나라가 강성하여 항상 유럽의 여러 대국과 함께 동, 서양 사이로 내달리므로 항상 약소한 자를 도와주고 공정한 논의를 유지하여, 유럽 사람으로 하여금 나쁜 짓을 함부로 할 수 없게 하였다. 나라의 형세가 대동양(大東洋)에 두루 미치고 그 상무(商務)가 홀로 대동양에서 왕성하였다. 또한 동양이 각기 제 나라를 보전하여 편안히 살며 무사하기를 희망하여 그 사절을 보내지 않았다. 그러므로 조선으로서는 마땅히 항상 만 리 대양 밖에 사절을 보내서 그들과 더불어 수호해야 할 것이다. 하물며 그들이 계속해서 사신을 보내어 조선과의 연결을 유지하려는 뜻이 있음에랴! 우방의 나라로 끌어들이면 도움을 얻고 근심을 풀 수 있다. 이것이 미국에 연결해야 하는 까닭이다.
무릇, 중국과 친하다는 것은 조선이 믿을 것이요, 일본과 맺는 것은 조선이 반신반의할 것이요, 미국과 연결하는 것은 조선이 매우 의심할 것이다.
……(중략)……
이미 모든 의심이 풀리고 국시(國是)가 정해지면, 중국과 친해지는 데에는 옛 헌장(憲章)을 조금 변경하고, 일본과 맺는 데에는 조규(條規)를 빨리 수정하고, 미국과 연결하는 데에는 좋은 맹약을 급히 체결해야 할 것이다. 곧 황제에게 주청(奏請)하여 조선의 관리가 북경에 항상 상주하도록 하고, 또 사신을 보내어 도쿄에 주재시키고 또는 사신을 워싱턴에 보내어 소식을 통하게 한다. 그리고 또 주청하여 봉황청(鳳凰廳)의 무역을 확장하고 중국 상인이 배로 부산·원산·인천 등 각 항구에 와서 통상하게 함으로써 일본 상인의 농단을 막고, 또한 국민이 나가사키(長崎)·요코하마(橫濱)에 가서 무역을 익히게 한다. 그리고 곧 주청하여, 육해군이 중국의 용기(龍旗)를 사용하여 이를 전국의 휘장으로 삼는다. 또 학생을 보내어 북경 동문관(同文館)에서 서방의 언어를 익히고, 직예(直隷)에 가서 회군(淮軍)의 군사 훈련을 익히고, 상하이 제조국에 가서 기계 만드는 것을 배우고, 복주(福州) 선정국(船政局)에 가서 배 만드는 것을 배운다. 무릇 일본의 선창·총포국·군영에도 대개 가서 배울 수 있고, 서양인들의 천문·산법(算法)·화학·광학·지학(地學)도 모두 가서 배울 수 있다. 또 부산 등지에 학교를 설립하여 서양인을 맞아들여 교습시킴으로써 무비(武備)를 널리 닦아야 한다. 참으로 이 같이 할진대 조선 자강의 터전은 이로부터 이룩될 것이다.
……(하략)……
황준헌, 「조선책략」
- 하늘에 맹세한 기록.
- 이해관계가 깊음을 비유한 말. 수레의 덧방나무와 바퀴가 떨어질 수 없는 것처럼 서로 도와서 의지한다는 뜻
- 한(韓), 조(趙), 위(魏)가 합종(合縱) : 중국 역사에서 B.C. 4세기 말에 접어들면서 진(秦)이 최강국으로 등장하여 여러 열국(列國)을 위협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동방에 있던 조(趙)·한(韓)·위(魏)·연(燕)·제(齊)·초(楚) 등 6국은 종적으로 연합하여 서방의 진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었다. 이를 합종이라 하며, 합종책을 주도한 사람은 소진(蘇秦)이었다. 후일 진나라는 합종책을 깨기 위해 연횡책(連衡策)을 구사하였다.
- 입술과 이의 관계처럼 아주 밀접하여, 그 운명도 함께 한다는 뜻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