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보름 사이에 전봉준(全琫準)
과 김개남(金開男) 등은 남원에 크게 모였는데, 그 수가 수만 명에 이르렀다. 전봉준
은 각 읍의 포(包)에 명령하여 읍마다 도소(都所)를 설치하고 자기 사람으로 집강(執綱)을 세워 수령의 일을 수행하게 하였다. 이렇게 되자 호남 지방의 군마(軍馬)와 돈, 곡식은 모두 적이 장악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비로소 저들의 역모를 알게 되었지만, 이미 형세가 이루어진 뒤라 제지하지 못하고 난민(亂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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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김학진(金鶴鎭)은 이들을 무마할 수 있다고 믿어 오히려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서울에서 난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군관 송사마(宋司馬)에게 편지를 가지고 남원에 들어가 전봉준
등에게 나라의 어려움을 함께할 것을 약속하고 도인들을 이끌고 와서 전주를 함께 지키자고 타이르게 하였다. 대개 전봉준
등이 겉으로는 잘못을 뉘우치고 귀화하겠다고 말하였으므로, 김학진은 그들을 불러 어떻게 행동하는가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전봉준
은 편지를 들고 망설이다가 탄식하면서 “마땅히 한 번 죽어 나라에 보답하여 내가 난을 일으킨 죄를 속죄하겠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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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무리를 정돈하고 행동할 계획을 작정하였다. 그러나 김개남은 이에 따르지 않고 자신의 부대를 거느리고 샛길로 도망하여 돌아갔다. 전봉준
이 전주로 들어올 때 전주가 가까워질수록 그 무리들은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 대부분 도망쳤고, 다만 심복 40~50명만 함께 들어왔다. 선화당(宣化堂)에서 김학진을 만났는데, 김학진이 길 양편에 무장 군인을 배치시켜 놓았으므로 전봉준
등은 전율하며 얼굴색이 변하였다. 이들은 머리를 조아리고 타이르는 말을 들었으며, 군에서 자신들을 써 주기를 원하였다. 김학진은 이들을 신뢰하여 전봉준
에게 “항복한다면 나머지 적들은 종이 한 장으로 불러들일 수 있게 되니 이는 세상에 둘도 없는 공을 이룰 수 있다”라고 말하고, 드디어 진심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속마음까지 들어내 보여 의심이 없음을 나타냈다. 그리고 감영(監營)
휘하의 군사권을 모두 전봉준
에게 넘겨주었고, 영내에 있던 경군(京軍)이 서울로 떠나 버리자 감영
의 호위가 약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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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영(監營)' 관련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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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진은 문관 출신으로 사람을 다루는 재주가 없었다. 전봉준
은 자신의 죄가 막중하여 용서받을 수 없고, 또한 다른 적은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도 않고 세력이 강하여 제어할 수도 없었으며, 서울의 안위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만약 호남 전체를 차지하고 가만히 앉아서 정세를 살핀다면 이 또한 견훤(甄萱)
의 무리였는데, 이들이 몰래 여러 적을 진지로 불러들이니 명색은 성을 지킨다는 것이었지만 실은 성을 포위하는 것이었다. 김학진은 마치 꼭두각시처럼 모든 행동을 마음대로 할 수 없었고, 다만 문서를 받들어 시행할 뿐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도인감사(道人監司)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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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의 창건자
이 한쪽을 차지하였던 국면과 같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김학진을 옆에 낀 것을 기회로 삼아 전라도를 모두 제멋대로 하였다. 김학진의 좌우는 모두 전봉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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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 편, 『오하기문』 2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