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회 사건
1917년 10월 이후 안동현(安東縣)·오룡배(五龍背)·신의주·평양·금천·경주 등으로부터 경상남북도·충청남도·경성 등의 부호(富豪) 앞으로 광복회 명의로 된 국권 회복 운동 자금을 제공하라는 불온한 통고문이 빈번하게 우송되어 관계 도(道)에서 수사 중이었다. 1918년 1월에 충청남도 경무부에서 관계자를 체포하여 조사한 결과 경상북도 내 칠곡군의 부호 장승원(張承遠) 및 충청남도 아산군 도고면(道高面) 면장 살해 사건도 광복단원의 소행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 사건의 주범인 박상진(朴尙鎭)은 경상북도 경주군 외동면 염동리에 거주하는 전 규장각
(지금의 경학원) 부제학 박시규(朴時奎)의 장남이다. 여러 대에 걸쳐 고위직에 오른 덕망 높은 양반
출신으로 어렸을 때부터 큰 뜻을 품고 16세까지 집에서 한문을 배운 후 경상북도 선산군 출신으로 당시 참정(지금의 내각 서기관장)이었던 허위(許蔿)에게 수년 동안 교육을 받았다. 21세에 그 문하를 떠나 26세까지 경성의 양정 의숙
에 들어가 법률과 경제학을 공부한 후 판사 등용 시험에 합격했다. 그 사이 은사 허위가 일본이 한국을 보호국화 하여 통감부
를 설치한 것에 분개하여 마침내 관직을 버리고 경기도 임진강과 강화도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켜 당시 정부를 전복하고 견고한 정부를 수립하려 했다. 하지만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결국 1908년 체포되어 경성 감옥
에서 사형 처분을 받았다. 그래서 박상진은 시신을 거두어 독실히 장사를 지냈을 것으로 보이는 인물이다. 그는 허위의 교육에 영향을 받아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매우 깊었다. 이후 때를 기다리다 1917년 음력 6월 채기중(蔡基仲, 안동 출신?)과 협의한 뒤 가장 먼저 조선 남부의 부호들에게 협박문을 보내 군자금을 징수하되 만약 응하지 않으면 사살했다. 이 외에도 충청남도 직산군 금광을 습격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화폐를 위조해 조금씩 정화(正貨)로 바꿨다. 이후 동북 삼성(三省)에서 조선인 장정들을 훈련시켜 군대를 편성하는 한편 조선 내 주요 지방에서 한 곳마다 1만 원의 자본으로 100곳에 잡화상을 위장하여 개업했다. 그 이익으로 국권 회복 자금에 충당한 동시에 무기 구입을 계획하여 하루아침에 일본과 외국의 국교가 단절되면, 한꺼번에 봉기하여 일본에 반항해서 결국 일본이 조선을 포기하게 만들려고 하였다. 그래서 우선 광복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할 것을 결단하고, 위에 설명한 대로 각 지방의 부호들에게 불온한 문서를 보냈다. 또 1912년 박상진이 중국의 혁명 상황을 시찰하기 위해 중국으로 갔을 때 입수한 권총 10여 개(판명된 것은 우이견(禹利見) 등이 구입한 것을 합하여 11정)를 각 동지들에게 나눠 주고 강도 살인에 사용하도록 제공했다.
'규장각' 관련자료
'양반' 관련자료
'양정 의숙' 관련자료
'통감부' 관련자료
'경성 감옥' 관련자료
……(하략)……
경상북도경찰부, 『고등경찰요사』, 1934
광복회 부활 취지 및 연혁
우리 대한의 3,000만 동포는 누구나 한 몸으로 일본의 포악한 질곡에서 신음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러나 본 광복회는 이 질곡을 벗어 버리기 위해 지금으로부터 31년 전에 설립되어 가장 오랫동안 투쟁했으며 조직적으로 가장 견고한 의식 아래 제일선에서 항상 분투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참혹한 탄압을 받아 사형과 총살의 이슬이 된 동지가 십수 인이며 체형을 당한 동지가 300여 명에 달했다.
……(중략)……
우리 대한의 3,000만 동포는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는 과거, 멀리 말하면 50년 전이며 가깝게 말하면 36년간이라는 오랜 세월에 걸쳐 일본의 세계 병탄주의 전투의 제일선에서 포로가 되었다. 그래서 이 포로의 신세로 받은 만신창이를 회복하려면 한시의 유예도 없이 정치·군사·경제·농공·교육 등을 모두 고치고 건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에 따라 우리 광복회는 과거의 목표인 우리 대한 독립을 우리 민족의 생활력 회복으로 발전적 추진을 강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중략)……
「광복회 부활 취지 급 연혁」, 광복회, 『광복회』, 19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