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
총재 서일(徐一)로부터 1월 15일 우리 대본영에 도착한 보고에 따르면 경과한 상황은 다음과 같다.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 관련자료
1. 전투 전후 아군(我軍)의 정황
대한군정서
는 민국(民國, 1920) 2년 2월 초부터 사관연성소(士官鍊成所)를 중국령 왕청십리평(汪淸十里坪)의 삼림 중에 열어, 지난 9월 9일에 제1회 필업식(畢業式)을 거행하고
【필업생 298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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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군정서' 관련자료
한편으로 보병을 모집하여 조련을 실시했는데, 적의 강경한 교섭으로 인하여 중국 육군이 2~3회 출동하여 독립군의 해산을 재촉하기에, 독립군은 부득이 영사(營舍)를 버리고 병종 별로 전투 서열을 만들어 남진하였다.
화룡현·삼도구·청산리 또는 이도구에서 적군과 전투를 벌여 수많은 적의 장졸을 살상했는데, 다행히 아군의 사상은 극소하였다.
아군은 맹렬한 전투를 치러 장졸이 모두 피로한 가운데, 적은 다시 왕청 대황구(大荒溝) 및 습자구(褶子溝)에 주둔하였던 보병 및 기병 양 부대의 병력을 철수하여 보산(寶山) 이남으로 집중하였는데, 그 기세가 대단하였다.
그러므로 아군은 병력을 몇 개의 부대로 나누어 1대는 전투지 부근에 머물게 하여 전장(戰場)을 정리하고 적의 정황 수색에 종사케 하고, 다른 대는 소로 혹은 ○○○소로로 ○○를 거쳐, ○○으로 나아가게 하고, 다른 1대는 낮에는 기고 밤에는 걸어서 ○○을 경유하여 ○○○○○○○로 직진하니, 당시 추운 계절에 옷과 신발을 제대로 착용하지 못하여, 그 정경이 참으로 말로 하기 어려웠다.
……(중략)……
우리 한국인 촌락이 매우 낙후하여 몇 백 명 군대의 의복과 식량도 공급할 수가 없어, 부득이 ○○방면으로 점차 진행하던 중이며 서북간도
의 각 군단은 태반이나 이곳에 집합하여 서로 연합하여 일치 행동을 하게 되니
【각 단을 합하여 ○○○○인】
병력은 많고, 군의 사기는 높고 단단하여, 능히 제2회 결전도 바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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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청산리와 천수동 부근의 전투 상황
이는 『독립신문
』 제88호 4면에 게재한 전투 정보와 큰 차이가 없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독립신문' 관련자료
3. 피아의 사상과 아군의 전리품
1) 적의 사상자
사망자 연대장 1인, 대대장 2인, 기타 장교 이하 1,254인
【적 자기들끼리의 격살자 500여인】
, 부상자 장교 이하 200여 인
2) 아군의 사상과 포로
사망 1인, 부상 5인, 포로 2인
3) 아군의 전리품
기관총 4정, 소총 53자루, 기병총(騎兵銃) 31자루, 탄약 5,000발, 군도 5자루, 나팔 2개, 말안장 31개, 군용 지도 4점, 손목시계 4개, 기타 피복, 모자, 모의, 휴대 천막, 군대 수첩 등속 약간
4) 전투 담당 장교
사령부 사령관 김좌진(金佐鎭)
'김좌진(金佐鎭)' 관련자료
사령부 참모부장 나중소(羅中昭), 부관 박영희(朴寧熙)
연성대장(硏成隊長) 이범석(李範奭), 연성대장 종군장교 이민화(李敏華), 김훈(金勳), 백종렬(白鍾烈), 한건원(韓建源)
……(중략)……
5) 피아의 승패 이유
이번 전투에 백반(百般)의 승산이 있었던 적은 왜 반대로 대패를 당했으며, 백반의 준비가 부족한 아군은 능히 전승을 얻었는지에 대해 약술한다.
적의 실패 이유
① 병가(兵家)에서 가장 금기시하는, 적을 가벼이 여기는 행위로 험한 골짜기와 커다란 산림 속을 별도의 수색이나 경계도 없이 맹진(盲進)하다가 항상 일부 혹은 전부의 함몰을 당했기 때문이며,
② 국지전술에 대한 경험과 연구가 부족하여 삼림과 산지 중에서 종종 자기들끼리의[自相] 충돌이 생겼으며,
③ 일본 군인이 전투를 싫어하는 마음과 죽기 싫어하고 살려고 하는 마음이 극도에 달하여 군기가 문란하고 사법(射法)이 정밀하지 못하여 1발의 효과가 없이 난사할 뿐이었다.
아군의 전승 이유
① 생명을 돌아보지 않고, 용감하고 분연히 결투하는 독립에 대한 군인 정신으로 적의 기세를 압도하였기 때문이었고,
② 양호한 진지를 선점하고 완전한 준비로 사격 성능을 극도로 발휘하였기 때문이고,
③ 임기응변의 전술과 예민하고 신속한 활동이 모두 적의 예측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오호라. 3일간 전투에 식량이 바닥나 다만 5~6개의 감자로 배를 채우고 하루 낮 하루 밤에 능히 150여 리의 험산 밀림을 통행하여도 조금도 사기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전투 후에 또한 수천 백 리 삼림의 눈 속을 통과하여 동상한 자가 적지 않았는데도 조금의 원망도 없음은 참으로 독립의 장래를 희망하기 때문이었다.
『독립신문』, 1921년 2월 25일, 「대한군정서 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