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조선은 한일 합방 당시라 공기가 흉흉하여, 친일파는 기세가 등등 살기(殺氣)가 험악하고, 배일자(排日者)는 한심 처량하지마는 어찌하리요. 친일파의 기세가 등등하고 살기가 날카로워 공기가 험악한데 이 같은 모험 행동을 하시니. 안동현서 500리 되는 횡도천(橫道川)으로 가셔서 임시로 자리를 잡고 석오(石吾) 이동녕(李東寧) 씨, 친족 이병삼(李炳三) 씨를 그 곳으로 먼저 가솔들을 데리고 안정(安定)을 시키고, 앞으로 오는 동지(同志)의 편리함에 대한 책임을 부탁하며 양미(糧米)와 김장까지 여러 십 독을 준비하라고 부탁하셨다.
8월 (초)회초간(晦初間)
그믐과 초승을 아울러 이르는 말
에 돌아와서 여러 형제분이 일시에 합력하여 만주로 갈 준비를 하였다. 비밀리에 전답과 가옥⋅부동산을 방매(放賣)하는데, 여러 집이 일시에 방매를 하느라 이 얼마나 어려웠겠는가. 그때만 해도 여러 형제 집이 예전 대가(大家)의 범절(凡節)로 남종⋅여비가 무수하고 임금과 신하의 좌석이 분명한 시대였다. 한집안 부동산 가옥을 방매해도 소문이 자자하고 하인들의 입을 막을 수 없는 데다 한편 조사는 심했다. 우당장
【이회영
】
한 분이 옛 범절과 상하 구별을 돌파하고, 상하존비(上下尊卑)들이라도 주의(主義)만 같으면 악수하여 동지로 대접을 하였다. 팔도에 있는 동지들께 연락하여 1차로 가는 분들을 차차로 보냈다. 신의주에 연락 기관을 정하여, 타인 보기에는 주막(酒幕)으로 행인(行人)에게 밥도 팔고 술도 팔았다. 우리 동지는 서울서 오전 8시에 떠나서 오후 9시에 신의주에 도착, 그 집에 몇 시간 머물다가 압록강을 건넜다.
'이회영' 관련자료
국경이라 경찰의 경비 철통같이 엄숙하지만, 새벽 3시쯤은 안심하는 때다. 중국 노동자가 강빙(江氷)에서 사람을 태워 가는 썰매를 타면 약 두 시간 만에 안동현에 도착한다. 그러면 이동녕 씨 매부 이선구(李宣九) 씨가 마중 나와 처소로 간다. 안동현에는 우당장이 방을 여러 군데, 여러 동지들 유숙할 곳을 정하여 놓고, 국경만 넘어가면 준비한 집으로 가 있게 하였다.
우리 시숙(媤叔) 영석장
【이석영, 이회영
둘째 형】
은 우당 둘째 종씨(從氏)인데, 셋째 종숙(從叔)께 양자(養子) 가셨다. 양가(養家) 재산을 가지고 생가(生家) 아우들과 뜻을 합하셔서 만여 석(萬餘石) 재산과 가옥을 모두 방매해 가지고 경술년(1910) 12월 30일에 대소가(大小家)가 압록강을 넘어 떠났다.
'이회영' 관련자료
우리 집은 나중에 떠나는데, 우당장은 며칠 후에 오신다고 하여 내가 아이를 데리고 떠났다. 신의주에 도착하여 몇 시간 머물다가 새벽에 안동현에 도착하니, 영석장께서 마중 나오셔서 반기시며 “무사히 넘어 다행이라” 하시던 말씀 지금도 상상이 되도다.
이은숙, 『민족운동가 아내의 수기 : 서간도시종기』, 정음사, 1975, 16~17쪽
27일에 국경을 무사히 넘어 도착하시니 상하 없이 반갑게 만나 과세(過歲)도 경사(慶事)롭게 지냈으나, 부모지국(父母之國)을 버린 망명객들이 무슨 흥분(興分) 있으리요. 그러나 상하 없이 애국심이 맹렬하고, 왜놈의 학대에서 벗어난 것만 상쾌하고, 장차 앞길을 희망하고 환희만으로 지내 가니 차호(嗟乎)라.
이은숙, 『민족운동가 아내의 수기 : 서간도시종기』, 정음사, 1975, 18쪽
우당장은 말을 스스로 몰아서 타고 차와 같이 강판에서 속력을 놓아 풍우(風雨)같이 달리신다. 나는 차 안에서 혹 얼음판에서 실수하실까 조심되었고, 6~7일 지독한 추위를 무릅쓰고 가군의 마음을 평안히 받드느라 돌 전 유아(幼兒), 지금 장실(莊室)을 안고 종일 좁은 차 속에서 고생하던 말을 어찌 다 적으리오. 그러나 괴로운 사색(辭色)은 조금도 나타내지 않았다. 종일 백여 리를 행해도 큰 가게가 아니면 백여 필이 넘는 말을 어찌 두리오. 밤중이라도 큰 가게를 못 만나면 밤을 새며 가는 때도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귀가 부인(貴家婦人)들이 이 같은 고생은 듣지도 못했을 것이어늘, 그러나 여필종부(女必從夫)의 본의를 지키는 것이다.
이은숙, 『민족운동가 아내의 수기 : 서간도시종기』, 정음사, 1975, 19쪽
둘째 영감께서는 항상 청년들의 학교가 없어 염려하시다가 토지를 사신 후에 급한 게 학교라, 춘분(春分) 후에는 학교 건설을 착수하게 선언하시고, 지단(地團) 여러 천 평을 내놓으시고 시량(柴糧)
땔나무와 식량
까지 부담하시고 아우님 오시기를 기다리셨다. 3월 초순에 우당장이 오시니, 여러 형제분은 자리를 못 잡은 모모 동지들께도 5간 방자에 1년 지낼 땅과 1년 농사지을 시량까지도 주어 안전케 하셨다. 그 외의 농군 방청으로 조선서 땅 사서 소작 주면 가을에 도조(賭租) 가져오듯 하는 건 외방청이고, 내방청은 일꾼 두고 자농(自農)하면 일꾼 식구는 다 먹이고 가을에 3분의 1은 일꾼의 삯용으로 주는 게니, 우리 동포 구하는 것이다. 세상에 우리 시숙 같으신 분은 금세(今世)에 없으신 분이지만 어느 누가 알리요. 생각 곧 하면 원통한 걸 어찌 적으리오.이은숙, 『민족운동가 아내의 수기 : 서간도시종기』, 정음사, 1975, 23~24쪽
우당께서는 신흥 무관 학교(新興武官學校)
1)
를 필역(畢役)
'신흥 무관 학교(新興武官學校)' 관련자료
공사를 마침
하시고 자기 자택은 급한 대로 방 세 개만 만들고, 계축년(癸丑年, 1913) 정월 초순에 떠나 조선에 무사히 가시었으나 어느 누가 있어 반기리오. 우선 사직동에 있는 나의 친정 대고모 댁으로 가시니 대고모님 모자분이 놀랍게 반기시고, 우선 미안하지만 주객(主客)이 비밀을 지키며 4~5달을 비밀히 묵으면서 동지들을 만나는데, 주야로 방에서 숨도 크게 못 쉬고 있었으니 오죽이나 미안하고 조심되셨으리오.이은숙, 『민족운동가 아내의 수기 : 서간도시종기』, 정음사, 1975, 26쪽
물처럼 빨리 흐른 시간이 2~3달이라, 저자 이 영구는 만주서 시댁 동기만 의지하고 시일을 보내다, 계축년(癸丑年, 1913) 3월 28일에 순산하여 득남(得男)
이회영의 아들 이규창(李圭昌), 본명 규호(圭虎)를 낳음
하였다. 산모(産母)와 유아 보호하느라고 셋째 동서가 보아 주시다가 이칠(二七)
2주
후에 가신 후, 큰딸 4세 된 아이와 포대기에 싼 유아를 데리고 그날그날과 싸우며 가군 오시기만 고대하니,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한 것이라 어찌 살아가리오. 매일같이 고대하다가 서산에 해가 져서 그날이 지나면 나의 쓸쓸한 생활을 운명으로 돌리고, 위험한 지방에 가 계신 가군 무사히 지내시다가 오심을 축수하며 시일과 싸웠다.이은숙, 『민족운동가 아내의 수기 : 서간도시종기』, 정음사, 1975, 27쪽
계축년(1913) 10월 15일은 존구(尊舅)
부인네들이 시아버지를 높여 이르는 말
생신일이라, 큰댁에 가 허배하고, 16일은 셋째 시숙 생신이라 그날 지내고 곧 둘째 댁을 다녀서 집으로 오려고 하니, 둘째 댁 영감께서, “추운데 어린것 데리고 더 좀 머물렀다 가시오” 하시기에 그대로 머물렀다. 10월 20일 오전 4시쯤 되어 마적 떼 50~60명이 총을 들고 들어오는 것을 마침 내가 용변을 보러 갔다가 그 총에 좌편 어깨를 맞아 쓰러지고 둘째 댁 영감은 마적에게 납치를 당하였으니, 이 같이 답답하고 흉한 일이 또 어디 있으리오. 계축년 10월 20일, 집 안에 퍼져 있는 거란 도적들뿐이고, 조선 사람이라고는 총 맞은 내가 어린것 둘을 데리고 있을 뿐인데 세 식구 몸에는 유혈이 낭자했다. 그 중에서도 내 식구 찾아다니느라 정신이 혼미 중에 생혈(生血)을 많이 쏟아 원기(元氣)가 탈진하여 정신을 잃어 혼절한 것을 우리 시누님께서 일심으로 간호하여 주셔서 두 시간 만에 회생(回生)하였도다.
날은 차차 밝아지고 도적들은 달아났다. 그 후에야 학교 선생들이 와서 나를 치료하였는데 그때서야 비로소 총 맞아 맞구멍이 난 줄을 알고 아연해하나, 산골에서 무슨 약이 있으리오. 우선 급한 대로 응급치료로 치약을 창구(瘡口)
부스럼 따위가 터져 생긴 구멍.
에 넣고 싸맨 후 이곳 학생 박돈서(朴敦緖)가 퉁화현에 가서 의사를 데리고 왔다. 이 학생은 바로 다섯째 댁 본집 동기가 되며, 의사 김필순 씨는 우리 동지로서 세브란스 병원
의 의학박사로, 적십자병원(赤十字病院)을 통화현에 와서 내고, 때를 기다리며 생활을 하는 분이다. 내왕 240리나 되는 길을 밤을 도와 21일 오후에야 의사와 함께 군대들도 와서, 의사는 나를 치료하고 군대는 영석장을 모시러 산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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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는 치료 후에야 지혈을 하니, 생혈을 이틀 밤 하루를 쏟고도 지금껏 칠십이 넘도록 살았으니 기구한 운명이로다.
한편 영석장 모셔 간 도적놈들이 그때 학생 둘을 함께 데리고 갔는데, 다시 그 학생들이 영석장을 모시고 오니, 오시는 길로 내게 들러서 나를 위로하셨다. 나는 그 때 시숙을 뵙고 어찌나 슬피 울었던지 우리 시숙께서도 비감하신 심정이라 말을 하시지 못하시며, “바삐 입원하여 완치케 하여 주겠으니 너무 마음 상치 말고 계시오” 하고 위로하시던 성음(聲音)이 지금도 역력히 들리는 듯하다.
만주인들은 영석장 존경하기를 ‘만주왕’이라고까지 명칭하였는데, 저희 나라가 문명(文明)치 못하여 도적들이 사면으로 횡행(橫行)하여 영석장을 모셔 갔다 하니, 저희 군대에서 이를 미안하게 생각하여 당황히 100여 명 군대가 출동하였다.
대장이 둘째 댁까지 와서 사과하고 나는 그 이튿날 들것으로 통화 병원에 입원하여 40일 만에 퇴원하여 돌아오니, 재생지인(再生之人)이라고 기뻐들 하시고, 4세 된 딸은 저의 고모님이 보호하시다가 엄마 온다고 좋아하던 모습 잊을 수가 없다. 내 자신은 육신을 임의로 못 쓰고 시숙께서 치료비까지 전담해 주시니 미안한 마음은 이루 말할 수도 없었다.
약은 며칠에 한 번씩 병원에서 가져다가 아들 규룡이가 치료를 하여 주어 하루하루를 나아가나, 생혈을 너무 쏟아 원기는 탈진되고 생명만이 겨우 부지되었을 뿐이다. 가군이나 계셨으면 총을 맞지도 않았을 것이고, 총을 맞았어도 이 같이 구차히 치료도 아니 할 것인지라, 모든 게 나의 운명, 한하면 무엇하리오.
이 같이 큰 고생을 겪은 후에 병원에서는 쌀밥에 육식(肉食)을 먹고, 둘째 댁에서 며칠 만에 사람이 오면 고기를 사다 주시어 음식 보양도 좀 했다. 그러나 집으로 온 후로는 둘째 댁에서 쌀도 보내 주고 혹 육종(肉種)도 보내지만 어찌 이루 보내리오.
세월이 흘러 육신 못 쓴 지 4~5달이 되니 갑갑도 하고 슬프기도 하였다. 더욱이 내 몸이 임의롭지 못하고 생활은 날로 어려워, 둘째 댁에서 강냉이 몇 부대를 보내면 그걸로 지내 가니 갖가지 답답한 말을 어찌 다 적으리오. 그러구러 갑인년(甲寅年, 1914) 2월이 되어, 조선 같으면 입춘이 지났으니 일기가 온화할 것인데, 만주 일기는 2월이라도 조선 심동(深冬) 같이 매우 추웠다.
나는 육신은 작용을 못 하고 누워서만 지내는데, 그때 우리 규창이가 첫돌이 3월이라 잘 기어 다니며 우뚝우뚝 서서 걸음마를 하려고 하는 때이다.
하루는 일꾼 여자가 바느질한다고 인두를 쓰다가, 화로에 불은 많지 않지만 인두 꽂힌 걸 그냥 두고 강냉이를 타러 간 사이에 우리 규창이가 화로에 엎어졌다. 손도 데고 면상(面上)은 인두에 데어 그 어여쁜 얼굴에 흠을 지은 일 생각할수록 원통 애닯은 마음 내 죽기 전 잊으리오. 병원이나 가까우면 면상의 흠은 없을 것을, 엄마는 팔 하나를 못 쓰고 유아까지 데어 놓고 저의 부친을 무슨 면목으로 뵈오리오.
이은숙, 『민족운동가 아내의 수기 : 서간도시종기』, 정음사, 1975, 28~31쪽
사위 박창서와 셋째 동서만이 서울로 가서 동서가 우당장에게 자세한 말씀을 드려 두 달 만에 오라는 허락을 받고 정사년(1917) 6월 27일 그리운 고국을 향하여 떠나 장단역(長湍驛)에 당도했다. 삼각산을 바라보니 감개무량하며 산천도 반기는 듯, 그립던 고향 산천 6~7년 만이라 새로운 회포 처량한데, 하물며 우리 부모님께선들 이 무남독녀를 오죽이나 그리워하셨을까. 이 불효 여인식은 만주에서 반생반사(半生半死)에 갖은 고생을 당하느라고 부모에게 향한 마음 미처 돌아갈 사이도 없었으며, 만사를 운명으로 돌리고 6~7년간 살아온 그 경상이란 단숨에 다 쓰기 어렵도다.
이은숙, 『민족운동가 아내의 수기 : 서간도시종기』, 정음사, 1975, 36~37쪽
경신(1920), 신유(1921) 1~2년간은 그럭저럭 손님 대접과 만세 소동에 동지들이 사업비와 생활비를 겸하여 혹 보내더니, 그나마 3~4년 후에는 단 일 푼 보내 주는 이 없었다. 왜놈들의 세력은 점점 높아 북경까지 뻗치고, 우리가 바라는 희망은 날로 사라지니 어느 인간이 이를 알아 알뜰히 보살펴 주리오.
내 지금도 역력히 생각나느니, 그때는 정말 뵙기 딱하고 가엾으시지. 하루 잘해야 점심 한 끼만 먹고 그렇지 않으면 밥 못 짓기를 한 달이면 반이 넘으니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하도다. 노소 없이 형용이 초췌한 중에 노인이 어찌 견디리오.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픈 일이다.
불쌍하신 우리 가군, 기결이 씩씩하신 풍도(風度)에 일확천금을 일시에 희롱하시던 마음으로 적수공권(赤手空拳) 수중에 무일푼이고, 슬하 권속이 기한(飢寒)을 못 이겨 하는 걸 보시고는 만사를 참으실 제 얼마나 마음이 아프실까를 생각하고 나로서는 가군에게 조금도 어려운 빛을 안 보이려고 하나, 노인이 기한을 못 이겨 하시는 걸 보면 차마 딱하고 가슴이 아픈지라. 아무리 영웅호걸이라도 적수공권이니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 금전은 사람에게 활이라, 지금도 생각하면 열렬하신 마음으로 만사를 참고 지내시던 일이 금창이 녹는지라.
이은숙, 『민족운동가 아내의 수기 : 서간도시종기』, 정음사, 1975, 40~41쪽
을축년(1925) 반년은 이렇듯2)
심고를 겪고 나날을 굶으며 먹으며 지내 가는데, 생불(生佛)이 아니고서야 어찌 부지하리오. 생각다 못해 고국에 다시 돌아가서 생활비라도 마련해 볼까 하고 내외 의논하던 차에 상해 가셨던 해관 선생이 북경 소문이 하도 요란해 오셨다 하며 오시니 오죽이나 반가우리오. 해관 선생과 같이 의논하고 을축년 7월 하순에 떠나서 왔다. 그때 차를 문밖에 놓고 작별하고 나올 때 가군께서 내가 떠나는 걸 보지 않으려고 그러셨던지, 현아가 7세라, 엄마를 따라나서는 걸 저의 부친께서 데리고 들어가며 달래시기를,
2)
1925년 북경에 살 때 다물단에 의하여 일제 앞잡이 김달하(金達河)가 처형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은숙은 상황을 잘 모르고 조상에 갔다 왔다. 이후 김창숙이 “우당장 내외가 김달하 초종(初終)에 조상(弔喪)을 갔었으니 앞으로 절교하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이은숙은 남편의 안위를 위해 아들 규창을 데리고 칼을 간수하여 신채호
와 김창숙이 묵고 있는 집으로 찾아가 아침 식사 중인 이들을 바짝 추켜잡고 따졌다. 얼마 후 두 사람이 미안하게 되었으니 허물치 말아 달라고 하였다. 게다가 이런 곤란과 더불어 당시 이들 부부는 딸 현아가 늑막염에 걸렸는데 치료비도 낼 수 없는 가난함에 처해 있었다.
'신채호' 관련자료
“네 어머니 속히 다녀올 제 과자 사고 네 비단옷 해 가져올 거다” 하며 달래시던 말씀 지금도 역력하도다. 슬프다, 이날이 우리 부부 천고영결(千古永訣)이 될 줄 알았으면 생사간(生死間) 같이 있지 이 길을 왜 택했으리오.
이은숙, 『민족운동가 아내의 수기 : 서간도시종기』, 정음사, 1975, 53~54쪽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하다는 말은 우리에게 한 말인 듯하도다. 그럭저럭 그 해를 다 보내고 무진년(1928)이 되니 북경서 온 지가 만 3년이라. 유수 같은 세월은 속절없어, 수천 리 밖에 식구를 두고, 또 며느리 하나가 저의 시부모 시중을 지극히 하다 애처롭게 세상을 떠나고, 큰딸과 규창, 현아 3남매를 데리시고 나날을 보내시니 오죽이나 갑갑하실까.
그런데 현숙이가 홍역을 중히 한다고 기별이 오니, 들려오는 말마다 답답하매 여비만 있으면 곧 가고 싶은 마음이나 한편 다시 생각하고, 이왕 온 지 3~4년에 한 푼 없이 가는 것보다 다소간이라도 마련하여 간다는 것이 못 가고 말았도다.
북경에서 나온 지가 어언간 4년이 되어 가니 혹 그간에 무슨 변통이나 해 가지고 오는가를 기다리실 분의 마음이나, 못 가고 있는 이 마음이나 오죽인들 궁금하고 갑갑하리오. 그래도 천진서 지내시는 범절이 안전만 해도 안심이 되겠거늘…….
이 해는 무진년(1928) 하절, 하루는 가군에게서 온 편지를 보니, 급한 사정으로 규숙, 현숙을 천진 부녀구제원(婦女救濟院)으로 보내어 성명은 홍숙경과 작은아이는 홍숙현으로 고쳤으니, 편지할 때엔 ‘구제원 홍숙경’이라고만 하면 받아 본다 하시고, 당신은 규창이를 데리고 무전여행으로 상해를 가니 혹 다소간 되거든 현아에게로 부치라고 하시고는 지금 떠나면서 부친다고 하셨으니, 세상에 이런 망창한 일이 또 있으리오.
그 편지를 보고 나는 혼절(昏絶)을 다하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다.
이은숙, 『민족운동가 아내의 수기 : 서간도시종기』, 정음사, 1975, 61~62쪽
밖에서 “현숙아!” 부르시는 음성이 시외숙모시라. 급히 나가 보니 시외숙모께서 전보를 주시면서,
“신경에서 통동으로 전보가 왔다고 가져왔기에 내가 왔다”
하시며 전보를 주고 가신다. 어떤 전보인가 하고 의당 선생을 주었더니 선생이 보시더니 “이게 웬일인가? 내가 전보를 잘못 보았나? 이 전보에는 ‘선생님께서 오늘 오전 다섯 시에 돌아가셨다’고 했는데 내가 일어(日語) 말을 잘 모르니 어디 내가 우편국에 가서 자세히 알아보고 오겠다” 하시고 황망히 나가셨다. 좀 있다가 들어오시면서 말을 못 하시고는 낙루하시며, “정말 돌아가신 전보다” 하니, 슬프도다, 6~7년을 고심열성(苦心熱誠)으로 수만 리 이역에서 상봉할 날만 고대하였더니 이런 흉보를 받게 될 줄이야. 하늘이 무너지는 듯 하늘을 우러러 울부짖으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성이 무너지는 듯한 애통함(남편의 죽음)을 당한 이내 박명 무슨 낯을 들고 다니리오.
이은숙, 『민족운동가 아내의 수기 : 서간도시종기』, 정음사, 1975, 74쪽
(만주 환인현) 대황구(大荒溝)는 (만주 통화현) 다취원에서도 첩첩산중으로 10리를 더 가야 했다. 여기저기 물어서 왕산댁부터 찾아 들어갔다. 고향에서는 큰 기와집에서 종 부리고 벼슬하며 잘 사시던 분인데, 막상 뵙고 보니 사시는 모습이 너무나 초라했다. 산비탈 토굴 같은 집에서 방 두 칸을 겨우 마련하여 이 방 저 방 무더기 지어 거처하고 계셨다. 산전을 개간하여 손수 농사일을 하시면서……. 물론 일본놈들 때문에 못 살아서 떠나오긴 했지만 그래도 서간도
를 목표로 하고 올 때는 무진장 넓고 기름져서 먹고 살기는 좋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출발했는데…….
'서간도' 관련자료
이역만리 타관 땅에서 고생만 하다가 일가친척들을 한꺼번에 만나게 되니 서로들 너무나 반가워했다. 더구나 왕산댁은 고향을 황급히 떠나면서 우리에게 맡겨 두고 간 막내딸을 만나게 되었으니 더욱 반가워할 수밖에……. 살아서 다시 보게 될지 어떨지 막연했던 이산가족 상봉의 기쁨이 눈물바다로 만들었다.
우리도 거기서 우선 살기로 했다.
허은 구술, 변창애 기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정우사, 2000, 49쪽
고향에서는 양반
이라고 말고삐 잡고 경향 간 내왕이나 하며 글이나 읽던 분들이 생전 해 보지도 않고 특히 듣거나 본 적도 없는 화전 농사를 직접 하자니 마음대로 잘될 리가 없었다. 몸은 고달프기 짝이 없었다. 그해 가을에 거둬들인 식량은 겨우 가을 한 철 먹고 나니 다 떨어졌다. 다음 농사지을 때까지 지낼 일이 한심했다.
'양반' 관련자료
허은 구술, 변창애 기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정우사, 2000, 51쪽
연동 송씨의 조카 되는 송병기 씨, 그러니까 성산의 처조카도 이때 수토병으로 사망했고, 권팔도네도 하나밖에 없는 아기를 잃었다. 애 어른 할 것 없이 많이 죽었다. 요새 병명으로 장질부사라 하더라. 나도 그 병에 걸려 석 달을 앓았다.
나물을 개울에 가서 씻어 오다가 쓰러졌다. 그러고는 집에 와서 앓기 시작한 것이 시초였다. 고열이 나는 열병이라 8월이 되니까 머리털이 다 빠져서 새대가리 같았다. 만주 사람이 하는 약국에 가서 필담으로 약을 지어 와 먹어도 소용이 없어 성산어른이 산에 가서 약초를 구해다 달여 주었다. 서너 달 앓고 나서야 조금씩 회복되어 갔다.
……(중략)…… 먹을 것이 없어서 뜬 좁쌀죽에 소금하고 겨우 먹었다. 눈만 뜨고 송장이나 다름없이 누워만 지냈는데 그래도 용케 살아났다.
망명 온 댓바람에 겪은 일이라 모두들 당황했다. 중국에 자리 잡은 지 두 달 만에 그랬으니까. 수천 리 수만 리 고생길에 겨우 짐 풀어 놓고 자리 잡으려다가 그렇게 된 것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앓은 걸 보면 긴 망명길에 고생하고 지친 탓이었던 것 같아 수질이나 풍토가 우리 체질에 맞지 않아서 그랬을 수도 있고.
좀 더 나은 세상에서 살아 보겠다고 고생고생하면서 만주까지 왔다가 죽어 간 사람들 생각하면 참 허망하다. 특히 어린아이들의 죽음은 그 부모들 가슴에 못질을 한 것이다.
허은 구술, 변창애 기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정우사, 2000, 52쪽
세월이 한 5년 흐르는 사이에 두 집이 서로 이사를 갔다. 난리 피해 서로 이리 가고 저리 가다 보니 아주 멀리 떨어져 버렸다. 시집이 될 집은 완령허의 화전현으로 가고 우리는 하얼빈에서 천 리 더 들어간 영안현 철령허로 간 것이다. 친정과 시집이 2800리 떨어진 것이었다. 한국으로 말하면 남쪽 끝 부산과 북쪽 신의주쯤 된다.
요새 와서 2800리 눈길을 시집오던 생각하면 우습다. 눈 덩어리가 꽃송이같이 눈앞을 훨훨 날아다니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기차 타고 하얼빈 와서 자고 또 장춘으로, 장춘에서 길림까지.
운명이라는 것이 다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항일 투사의 집안에 태어나 항일 투사의 집으로 시집가게 된 것도 다 주어진 운명이었던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나라의 운명 때문에 한 개인의 운명도 그렇게 되었겠지.
혼례식을 위해 시아버님께서 그 먼 거리의 철령허로 오셨다. 노독여해가 심한 데다 독립 사업 걱정에 심경이 늘 안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시아버님 외택이 영안현에 있어서 한 10여 일은 거기서 유하셨다.
딸네 집(허국 씨네)도 들르시고, 친우들도 만나느라고 진작 못 떠났다. 혼인 10여 일 후에 떠나겠다는 편지를 화전현으로 부쳤다. 친정 부친께서 상객으로 같이 떠났다. 신랑, 나 그리고 시아버님, 친정 부친 해서 모두 네 명이 나섰다.
2800리 길 장정(長征)은 내 시집가는 길이요, 내 인생 여정의 길고도 험난함을 예고하는 길이기도 했다. 조국의 운명이 순탄했으면 그리 되었겠는가?
허은 구술, 변창애 기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정우사, 2000, 96쪽
시집살이 첫 시작으로 수십 일 비웠던 방에 불을 때니, 사방 쥐구멍에 연기가 나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아궁이가 불을 안 땐 지 오래라 쥐들의 안식처가 되어 있었다.
이렇게 시작된 시집살이 후 친정 소인식은 가뭄에 콩 나듯 드문드문 들었다. 한번 부모님 뵈러 가고 싶어도 2800리 길을 혼자 갈 수가 없었다. 멀기도 하지만 그 당시는 만주인들이 너무도 우둔무지하여 감히 혼자 여행은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보고 싶어 경경하던 그 심정 꿈을 빌려 만났어도 깨고 나면 허사되어 마음에 맺혔다.
허은 구술, 변창애 기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정우사, 2000, 100쪽
모든 독립운동 사업이 처음에는 봉천성 회인현부터 시작하여 통화현⋅유화현⋅길림성까지 뻗어 갔으니, 활동 범위는 그만큼 늘어났지만 그 넓은 지방에 해마다 하는 이사가 큰 사업거리였다.
워낙 내가 어려서 잘 몰랐으나 시집오기 전에 삼원포
⋅유화현⋅고산자로 옮긴 그때가 학교와 세포 단체가 많이 조직되고 활동도 활발했던 것 같다. 호사마다라고 의견 충돌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근본은 한국 독립을 주장함이라 국민 된 의무만을 다한다는 의식을 깨우치려 하였다. 그 때문에 교육 활동과 계몽 활동도 그때가 가장 활발했던 것 같다.
'삼원포' 관련자료
이 기간이 시집 쪽으로는 회인현 시절부터 통화현 시절까지의 활동 기간이었다. 이 13년간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들은 이야기로 보아 이때가 독립 활동의 기초를 세우고 조직을 강화하면서 세력을 확장해 나간 가장 중요한 시기였던 것 같다.
항상 손님은 많고, 땟거리는 부족했다. 점심 준비하느라 어떤 때는 중국인에게서 밀을 사다가 국수를 만든다. 마당의 땡볕 아래서 맷돌을 돌려 가루를 내어 또 그놈을 반죽해서 국수를 뽑는다. 고명거리가 없으니 간장과 파만 넣어 드린다. 삼시 세 끼 준비에 고초가 심했다. 시집온 다음 해에 한 번은 감기가 들었으나 누워서 쉴 수가 없었다. 무리를 했던지 부뚜막에 죽솥으로 쓰러지는 걸 시고모부가 지나가다 보고는 얼른 부축하여 떠메고 방에다 업어다 눕혔다. 다음 날도 못 일어났다. 그때가 열일곱 살이었다. 그러니 1923년이었지.
허은 구술, 변창애 기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정우사, 2000, 116쪽
아기는 6월에 생겨서 이듬해 3월에 낳았다.
아기 낳은 지 한 달이 되니까 애 아버지가 왔다. 그때 잠깐 와보고 훌쩍 떠난 후로 6년 동안 한 번도 안 나타났다. 신흥 무관 학교
다닐 때 벌써 독립운동 바람이 들었다. 열여섯 살에 그 학교 들어가서 졸업 학기에 이미 만주 전역과 전 조선을 훑고 다닌다고들 했다.
'신흥 무관 학교' 관련자료
정의부
요원으로 무장한 채 압록강을 건너가 평북 청성진의 일본놈 지서를 때려 부수었다. 그 때문에 붙잡혀 감옥에 갇혀 있다는 연락 한 번 받고는 소인식은 끝내 무소식이었다. 어디 가서 죽었지 살았다고는 생각 안 하고 지냈다. 감옥에 있다는 연락을 받아도 별 도리가 없었다. 나는 집안일 때문에 집 바깥을 한 발짝도 나설 수가 없었으니까……. 나타나면 그제야 왔나 보다 했다. 6년 동안 네 분 어른들 조석 봉양하고 사랑손님들 치다꺼리만 해도 역부족이었다.
'정의부' 관련자료
후얼란 집창자라는 곳의 조그만 장터 뒤에 살 때, 도랑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그 집은 양지바르고 농토도 좋아 농사도 잘되었다. 도랑만 건너면 장터인 데도 장에 한 번 나가 볼 틈이 없었다. 첫아기 도증이 갓난애인 데다 시어른들 수발해야지, 또 매일 산에 나무 하러도 가야 했으니까……. 농사일은 일꾼 둘한테 맡겼어도 할 일이 그렇게 많았다.
허은 구술, 변창애 기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정우사, 2000, 120쪽
중국⋅한국 두 나라가 다 일본국에 속해 있던 때라 만주 철도가 우리나라에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지금 남한⋅북한이 갈려서 철도가 끊긴 것 생각하면 가슴이 갑갑하다. 그렇게도 나라 찾으려고 그 고생을 했는데 나라를 두 동강으로 턱 쪼개놓고 지금까지 40년이 넘도록 철도가 끊어져 있다니…….
서울에 도착하니 출발해서 도착까지 무려 석 달이 걸렸다. 떠날 때 입었던 옷 그대로였으니 거지꼴은 오히려 낫다고나 할까?
아홉 살 철없던 나이에 남부여대(男負女戴)
남자는 지고 여자는 인다는 뜻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살 곳을 찾아 이리저리 떠돌아다님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풍찬노숙(風餐露宿)
바람을 맞으며 먹고 이슬을 맞으며 잠잔다는 뜻으로, 객지에서 많은 고생을 겪음을 이르는 말
하며 허씨 일문으로 떠났다가 파란만장(波瀾萬丈)한 세월을 다 겪고 스물여섯의 아낙, 고성 이씨 종부가 되어 고향에 돌아왔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통한이 뼈에 사무쳤다. 나라의 운명은 조금도 더 나아진 것이 없는 듯했다. 친정도 시가도 양쪽 집안은 거의 몰락하다시피 되어 있었다. 양가 일찍 솔가하여 만주 벌판에서 오로지 항일 투쟁에만 매달렸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요즈음 신문 읽어보면 그때 친일한 사람의 후손들은 호의호식하며 좋은 학교에서 최신식 공부도 많이 했더라. 그들은 일본⋅미국 등에서 외국 유학도 하는 특권을 많이 누리고. 그러니 그들은 훌륭하게 성공할 수밖에.
그러나 우리같이 쫓겨 다니며 입에 풀칠이나 하고 위기를 넘긴 사람들은 자손들의 교육 같은 것 생각지도 못했다. 오로지 어른들의 독립 투쟁, 그것만이 직접 보고 배우는 산교육이었다. 목숨은 항상 내놓고 다녔으니 살아 있는 것만 해도 기적에 가깝다. 애 어른 없이 그 허허벌판 거친 황야에 묻힌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은데…… 불모지에 자라는 잡초처럼 살았지.
독립투사들 가운데는 대를 이을 후손마저 없어 절손된 집안도 많다. 내 외사촌 한 사람이 우리 시댁 집안으로 시집온 이가 있는데 이름은 기억이 안 난다. 그 아들이 가을에 고향 간다고 한국 들어갔는데 고향에는 오지 않았단다. 그 후로 영영 행방이 묘연해진 거라. 모두들 가다가 도중에 일본놈한테 잡혀 죽었을 거라 했지. 그런 식으로 오고 가는 길에 일경들에게 붙잡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은 사람도 숱하게 많다. 또 일경에게 체포되어 기차 타고 오다가 철교에서 창밖으로 몸을 날려 자살한 애국지사도 있다는 말도 들었다.
나만 해도 이역풍상(異域風霜)에 호번한
넓고 크며 번거롭게 많은
가정이라 학교도 안 보내 주고, 고추꼭지나 따고 파 다듬는 일이나 도우게 하다 어린 나이에 시집이란 걸 보냈다. 풍진난리(風塵亂離) 판에 동서분간도 못하는 철부지를……. 그러니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한이 구십 평생 가슴에 못이 되어 있지. 지난 세월 한마디로 말하면 못 먹고 못 살았던 이야기뿐이라 부끄럽기만 하다. 바깥어른들 나가서 활동하시는 동안 내가 한 일은 오로지 입에 풀칠하는 방책에만 매달려 고생한 일뿐이니 어디 가서 교육을 받으며 어떻게 개명하였겠는가!
그러니 다들 고국에 돌아와도 자리 잡고 정착하기가 힘들었다. 마땅한 일거리가 없었다. 토지라도 있는 사람이면 겨우 농사꾼이 되는 거지. 농사꾼이 유학하고 온 사람과 같을 수 있나?
서울역에 떨어졌을 때의 우리 행색은 말이 아니었다. 외모도 초라하기 그지없었지만 마음이 더 춥고 떨렸다. 그렇게 이역만리 남의 땅에서 고국을 위해 애쓰고 투신했건만 귀환 동포를 따뜻하게 맞아 주는 손길은 없었다. 앞으로 살아갈 길이 막막했다. 무작정 고향집으로 향하는 수밖에 없었다.
허은 구술, 변창애 기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정우사, 2000, 174~1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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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강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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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5년 북경에 살 때 다물단에 의하여 일제 앞잡이 김달하(金達河)가 처형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은숙은 상황을 잘 모르고 조상에 갔다 왔다. 이후 김창숙이 “우당장 내외가 김달하 초종(初終)에 조상(弔喪)을 갔었으니 앞으로 절교하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이은숙은 남편의 안위를 위해 아들 규창을 데리고 칼을 간수하여 신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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