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국 상인의 내륙 상업 활동은 이번에 순회한 지방에서는 실로 놀랄 만큼 진보했다. 상업지라고 할 수 있는 곳에서는 반드시 청국 상인이 거주하면서 상업을 운영하고 있었고, 아무리 궁벽한 곳에 있는 촌락일지라도 장날에는 청국 상인들이 찾아온다고 한다. 공주·강경·예산 등의 시장에는 20~30인이 찾아왔다. 그 중 다수는 장날을 따라 돌아다니는 천상(賤商)이지만 공주·강경·예산 등에는 괜찮은 상인들이 들어와 상당히 큰 거래를 한다고 한다. 게다가 면직물
류, 각종 서양 물품, 청국산 옷감, 잡화류 등으로 곡물을 대규모로 사들이고 있으며, 구만포(九萬浦)
'면직물' 관련자료
충청남도 홍성군에 있는 포구
같은 곳에서는 상당한 자금을 투입해 매입하고 있다고 한다.종래 안성시에는 수원 상인들이 많아, 외국 상품을 인천에서 들여와 판매했다. 이 상인들은 100명이나 있었는데 근래 청국 상인들이 많이 시장에 찾아와 점점 상권을 빼앗겨 요즘 폐업한 자가 많았다. 공주·강경 등의 경우에는 (청국 상인들) 모두 가옥을 소유하여 가게를 열었으며, 전라도 전주의 경우는 30명 정도의 청국 상인이 들어와 전라도 각 지방의 장날에는 청국 상인들이 오지 않는 곳이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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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중국·서양·조선 상품 등을 팔면서 장날을 따라 행상하는 자들은 스스로 짐을 지거나 혹은 한국인을 고용해 지게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들 청국 상인의 일상 비용은 식사비는 2회 혹은 3회분을 지불하고 숙박료는 한국의 관습에 따라 식비에 포함되며, 하루에 300문에서 500문 정도이다. 화물 운반을 위해 한국인을 고용하면 식사 3회를 제공하고 하루에 500문을 준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 청국 상인은 음식물이나 복장 등이 추악하기 때문에 종종 한국인들에게 천시를 당하지만, 현재 상황을 보면 근검함과 인내함으로 한층 더 진보하여 한국의 보부상
들을 점차 압도하고 있다. 또 상당히 큰 거래를 하는 상인들도 자본이 부족해 점차 청국 상인들에게 추월당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태가 계속된다면 조선 팔도의 상권은 남김없이 조선 상인의 손에서 청국 상인의 손으로 넘어가고 말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보부상' 관련자료
公信第153號, 「[京幾黄海忠清三道ノ農況視察報告書(塩川書記生)]」, 明治26年 9月 30日, 『京城領事館報告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