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주인
20년 전의 경성과 현재의 경성을 누가 같은 경성으로 보겠는가. 변하더라도 여간 변한 것이 아니다. 첫째로는 주인이 변하였다. 그때에는 그래도 경성의 주인은 조선인이었다. 오늘날 ‘본정(本町)’이라는 어림도 없는 외람된 이름을 가진 곳이 그때에는 ‘진고개’라고 하여 외국 상인의 거류지
에 지나지 않았다. 행정 관청으로는 한성부라는 것이 서대문 밖에 있어서 그 장관인 한성 판윤 이하 모든 관리가 모두 조선인이었다. 그리고 경찰로는 경무청이라는 것이 있어서 경무사, 경무관, 총순, 권임, 순검 등 모든 직원이 전부 조선인이었다. 지금 광화문 앞은 요즘에도 노인들이 ‘육조(六曹)
앞’이라고 부르는데, 그때의 육조
는 없어졌지만 외부, 학부, 법부, 탁지부
, 내부, 군부, 농상공부 아문이 있고 그 안에는 대신, 협판, 국장, 참서, 주사 등 여러 관리가 있었는데 다 조선인이었다. 또한 원수부, 시위대, 진위대
등 영문(營門)
이 다 있어서 부장, 참장, 정령, 부령, 참령, 참위, 정교, 부교, 참교 등 군관과 병대가 있었고, 헌병과 군악대도 있었다. ……(중략)…… 또 그때 정동에는 각국 공사관이 있었다. 지금 영국 영사관은 영국 공사관, 러시아 영사관과 미국 영사관은 각각 러시아 공사관, 미국 공사관이었고, 정동에 있는 서대문 소학교는 본래 프랑스 공사관이다. 소위 (1907년) 정미 7조약
으로 한국의 외교권이 일본으로 넘어가게 되자 이 공사관들은 영사관으로 변하고 말았다.
'거류지' 관련자료
'육조(六曹)' 관련자료
'육조' 관련자료
'탁지부' 관련자료
'진위대' 관련자료
'영문(營門)' 관련자료
'정미 7조약' 관련자료
2. 지명
그때 경성의 원래 이름은 한성부다. 한성부에는 판윤이 있다는 것도 위에서 모두 말하였다. 그리고 한성부는 동서, 서서, 남서, 북서의 4서(署)로 나뉘었다. 서 밑에는 방(坊)이 있고 방 밑에 통(統)이 있고 통 밑에 호(戶)가 있었다. 따라서 가령 어떤 주소를 쓰려면 ‘한성부 서서 청진방 중학동 5통 3호’ 이런 모양이었고, 한성은 흔히 황성(皇城)이라고 썼으니 대황제가 계신 도성이란 뜻이다.
그때 경성에는 아직 ‘정(町)’이니 ‘정목(丁目)’이니 ‘통(通)’이니 하는 그 동안 보지도 못하던 글자를 가진 지명은 없었다. 지금 광화문통이라는 데는 ‘황토현(황토 마루)’, ‘황금정(黃金町)’이라는 데는 ‘동현(銅峴, 구리개)’, ……(중략)…… 새로운 주인인 일본인에게 그 이름이 불편하니까 ‘삼판통(三坂通)’, ‘의주통(義州通)’, ‘조일정(朝日町)’, ‘본정(本町)’ 이 모양으로 모두 저들의 방식으로 고쳐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새로운 주인이 고치니까 옛 주인들도 새로운 이름으로 불러야 유식하게 되었고, 겨우 노파와 ‘병문친구(屛門親舊)
길거리에 모여서 돈벌이하는 막벌이꾼을 일컫는 말
’들의 입을 빌려 과거의 지명이 전할 뿐이다.3. 기타의 명칭
지명뿐만 아니라 다른 명칭도 변한 것이 많다. 조선인 전체가 대한제국 신민에서 대일본 제국 식민지 토인(土人)인 ‘선인(鮮人)’으로 변하였으니 무엇인들 변하지 않았겠는가.
‘오방 재가(五房在家)
자기 집에다 담배쌈지, 바늘, 실 따위를 벌여 놓고 팔던 가게. 서울 남대문 큰길가에 여러 집이 있었음.
’는 ‘화양 잡화(和洋雜貨)’로, 포목전이나 지전 등의 ‘전(廛)’자는 ‘상점’으로, ‘보행객주(步行客主)
걸어서 길을 가는 나그네에게 술이나 음식을 팔고 손님을 재우는 영업을 하던 집.
’는 ‘하숙옥 영업(下宿屋營業)’ 또는 ‘여인숙’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몹시 신식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조선에서는 대궐 안에서만 사용하던 ‘어(御)’자를 붙여서 ‘어하숙(御下宿)’이라고까지 써서 붙이고, ‘백호치고
상투를 틀 때는 ‘백호친다’고 하여 정수리부분의 머리를 깎아내고 나머지 머리만을 빗어 올려 틀게 됨.
상투 짜오’가 이발관으로 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씨’, ‘댁입납(宅入納)’이 ‘양(樣)’, ‘전(殿)’으로 변하고 ‘근극(謹亟)’이 ‘より’로 변하는 것과 같은 것은 조선인의 자주성이 없다는 표시인가, 동화성이 많다는 표시인가. ……(중략)……5. 상투
모두 호랑이 담배 먹을 적 이야기다. 조선에 철도라고는 경부선과 경인선밖에 없었고, 20년 후에는 원가로 한국 정부에 매도한다는 계약으로 경의 철로 공사가 한창 진행되었다. 그러나 경성에 전차는 있었다. 프랑스 인 콜브란(Henry Collbran)과 광무제의 합자로 청량리에서 구 용산까지와 종로에서 서대문 정거장 앞까지의 전차선이 있었다. 전차는 지금 것과 달라 중앙에 상등실이 있고 전후에는 하등이 있어서 벽도 없이 좌우로 자유로이 승강하게 하였다.
이때 머리를 깎은 것은 일부 군인과 기독교인과 일진회
회원뿐이었다. 병정과 순검들도 망건을 도토리같이 동여매고 그 위에 군모를 써서 차양 밑에 망건을 졸라매는 띠가 살짝 보였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대황제 폐하께서 삭발하시고 끝이 뾰족한 투구를 쓰신 사진이 저자에 전하게 되자 상투가 세를 잃고 나날이 떨어져 버렸다.
'일진회' 관련자료
근래에 보천교도들이 상투를 숭상하게 되어 단절되어 가던 상투의 운명이 얼마쯤 길어지게 되었다. 실상 조선인은 상투를 너무 일찍 잘라 버렸다. 망건과 갓, 감투 대신에 쓰고 다닐 의관이나 장만해 놓고 잘랐다면 좋을 것을, 너무도 급히 잘라 버려서 아직도 제 의관조차 제 손으로 만들지 못하는 백성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조선인은 그 상투와 더불어 모든 옛 것-정말 모든 것을 다 내어 버리고 그가 마치 오사카 제(製)의 모자를 머리에 이고 다니는 모양으로 남의 통치와 남의 사상을 머리에 이고 다니는 허수아비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 중에 나 같은 못난이는 상투의 옛날 컴컴하고 구린내 나던 20년 전의 서울과 조선을 그리워하고 울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돌아오지 못할 과거다. 다만 회상의 눈물을 흘리는 것만이 나의 자유로 남았다.
『개벽』 제25호, 1924년 6월 1일, 「京城의 20年間 變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