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P는 광화문 네거리의 기념 비각 옆에서 발길을 멈추고 망설였다. 어디로 갈까 하는 것이다. 봄 하늘이 맑게 개었다. 햇볕이 살이 올라 포근히 온몸을 싸고 돈다. 덕석 같은 겨울 외투를 벗어 버리고 말쑥하게 새로 지은 경쾌한 춘추복의 젊은이들이 봄볕처럼 명랑하게 오고 가고 한다. 멋쟁이로 차린 여자들의 목도리가 나비같이 보드랍게 나부낀다. 그 오동보동한 비단 다리를 바라보노라니 P는 전에 먹던 치킨커틀릿
치킨 커틀릿(chicken cutlet). 닭고기를 튀김 가루에 묻혀 튀긴 것
이 생각이 났다.창을 활활 열어젖힌 전차 속의 봄 사람들을 보니 P도 전차를 잡아타고 교외나 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크림 맛을 못 본 지 몇 달이 된 낡은 구두, 구기적거린 양복바지, 양편 포켓이 오뉴월 쇠불알같이 축 처진 양복저고리, 땟국 묻은 와이셔츠와 배배 꼬인 넥타이, 엿장수가 이전어치 주마하던 낡은 모자, 이렇게 아래로부터 훑어 올려보며 생각하니 교외의 산보는커녕 얼핏 돌아가서 차라리 이불을 뒤쓰고 드러눕고만 싶었다.
마침 기념 비각 앞에 자동차 하나가 머물더니 서양 사람 내외가 내린다. 그들은 사내가 설명하고 여자가 듣고 하면서 기념 비각을 앞뒤로 구경한다. 여자는 사진까지 찍는다. 대원군이 만일 이 꼴을 본다면……이렇게 생각하니 P는 저절로 미소가 입가에 떠올랐다.
3.
대원군은 한말의 돈키호테였다. 그는 바가지를 쓰고 벼락을 막으려 하였다. 바가지는 여지없이 부스러졌다. 역사는 조선이라는 조그마한 땅덩어리나마 너무 오래 뒤에 떨어트려 놓지 아니하였다. 갑신정변
의 싹이 트기 시작해서 한일 병합 조약의 급격한 역사적 변천을 거쳐 자유주의의 사조는 기미년[1919년]에 비로소 확실한 걸음을 내디뎠다.
'갑신정변' 관련자료
자유주의의 새로운 깃발을 내건 시민의 기세는 등등하였다.
“양반
? 흥! 누구는 발이 하나길래 너희만 양발(반)이라느냐?”
'양반' 관련자료
“법률 앞에서는 만인이 평등이다.”
“돈…… 돈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신흥 부르주아지는 민주주의의 간판을 이용하여 노동자, 농민의 등을 어루만지고 경제적으로 유력한 봉건 귀족과 악수를 하는 동시에 지식 계급을 대량으로 주문하였다.
유자 천금이 불여교자일권서(遺子千金不如敎子一券書)
자녀에게 천금의 돈을 물려주는 것보다 책 한권을 가르치는 것이 낫다
’ 라는 봉건 시대의 진리가 자유주의의 세례를 받아 일단의 더 발전된 얼굴로 민중을 열광시켰다.“배워라, 글을 배워라……지식만 있으면 누구나 양반
이 되고 잘 살 수가 있다.”
'양반' 관련자료
이러한 정열의 외침이 방방곡곡에서 소스라쳐 일어났다. 신문과 잡지가 붓이 닳도록 향학열을 고취하고 피가 끓는 지사들이 향촌으로 돌아다니며 세 치의 혀를 놀리어 권학(勸學)을 부르짖었다.
“배워라! 배워야 한다. 상놈도 배우면 양반
이 된다.”
'양반' 관련자료
“가르쳐라! 논밭을 팔고 집을 팔아서라도 가르쳐라. 그나마도 못하면 고학이라도 해야 한다.”
“공자 왈 맹자 왈은 이미 시대가 늦었다. 상투를 깎고 신학문을 배워라.” 사이토(齋藤) 총독이 문화 정치
의 간판을 내어 걸고 골고루 학교를 증설하였다. 보통학교의 교장이 감동하고 분발하여 촌으로 돌아다니며 입학을 권유하였다. 생도에게는 월사금을 받기는커녕 교과서와 학용품을 대주었다. 민간의 유지는 돈을 거둬 학교를 세웠다. 민립 대학
도 생기려다가 말았다. 청년회에서 야학을 세웠다. ‘갈돕회1)
’ 가 생겨 갈돕 만주 외우는 소리가 서울의 신풍경을 이루었고 일반은 고학생을 존경하였다. 여학생이라는 새 숙어가 생기고 신여성
이라는 새 여인이 생겨났다.
'문화 정치' 관련자료
'민립 대학' 관련자료
1)
갈돕회 : 1921년 여름 창단된 고학생(苦學生)들의 친목 단체이다. ‘갈’은 서로라는 뜻이고, ‘돕’은 돕는다는 뜻이었다. 어려운 경제 형편에 공부하는 학생들을 돕기 위해 만주, 곧 만두에다 서로 손을 잡은 갈돕회 낙인을 찍은 것이 갈돕 만주였다. 고학생들은 이 만두를 떼다가 길에서 외치며 팔았다.
'신여성' 관련자료
이와 같이 조선의 관민이 일치되어 민중의 지식 정도를 높이는 데 진력을 하였다. 즉 그들 관민이 일치하여 계획한 조선의 문화 정도는 급속도로 높아갔다. 그리하여 민중의 지식 보급에 애쓴 보람은 나타났다.
면서기를 공급하고 순사를 공급하고 간이 농업 학교 출신의 농사 개량 기수(技手)를 공급하였다. 은행원이 생기고 회사원이 생겼다. 학교 교원이 생기고 교회의 목사가 생겼다. 신문 기자가 생기고 잡지 기자가 생겼다. 민중의 지식 정도가 높았으니 신문, 잡지 독자가 부쩍 늘고 의사와 변호사의 벌이가 윤택해 졌다. 소설가가 원고료를 얻어먹고 미술가가 그림을 팔아먹고 음악가가 광대라는 천대받는 호칭에서 벗어났다.
인쇄소와 책 장사가 세월을 만나고 양복점, 구둣방이 늘어서 있다.
연애 결혼에 목사님의 부수입이 생기고 문화 주택을 짓느라고 청부업자가 부자가 되었다. 그리하여 부르주아지는 가보
투전이나 골패, 화투 따위 노름에서, 가지고 있는 두 장 혹은 세 장짜리 패의 합이 끗수가 아홉인 경우를 이르는 말. 가장 높은 패이다.
를 잡고 공부한 일부의 지식군은 진주(다섯 끗)
투전이나 골패, 화투 따위 노름에서, 가지고 있는 두 장 혹은 세 장짜리 패의 합이 끗수가 다섯인 경우를 이르는 말.
를 잡았다.그러나 노동자와 농민은 무대(武大)
투전이나 골패, 화투 따위 노름에서, 가지고 있는 두 장 혹은 세 장짜리 패의 합이 끗수가 열이나 스물으로 꽉 차서 쓸 끗수가 없어진 경우를 이르는 말.
를 잡았다. 그들에게는 조선 문화의 향상이나 민족적 발전이 도리어 무거운 짐을 지워 주었을지언정 덜어 주지는 아니하였다. 그들은 배[梨] 주고 속 얻어먹은 셈
자기의 배를 남에게 주고 다 먹고 난 그 속을 얻어먹는다는 뜻으로, 자기의 큰 이익은 남에게 주고 거기서 조그만 이익만을 얻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이다.인텔리 …… 인텔리 중에도 아무런 손끝의 기술이 없이 대학이나 전문학교의 졸업 증서 한 장을 또는 조그마한 보통 상식을 가진 직업 없는 인텔리 …… 해마다 천여 명씩 늘어가는 인텔리 …… 뱀을 본 것은 이들 인텔리다.
부르주아지의 모든 기관이 포화 상태가 되어 더 수효가 늘지 않으니 그들은 결국 꾀임을 받아 나무에 올라갔다가 흔들림을 당한 셈이다. 개밥의 도토리다.
인텔리가 아니었으면 차라리…… 노동자가 되었을 것인데 인텔리인지라 그 속에는 들어갔다가도 도로 도망 나오는 것이 99프로다. 그 나머지는 모두 어깨가 축 처진 무직 인텔리요 무기력한 문화 예비군 속에서 푸른 한숨만 쉬는 초상집의 주인 없는 개들이다. 레디메이드 인생이다.
채만식, 「레디메이드 인생」, 19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