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로 본 한국사한국의 건국 신화 읽기2. 고구려의 주몽 신화 읽기2) 고구려 주몽 신화의 전승 자료와 내용

가. 광개토왕비

고구려의 시조 신화인 주몽(朱蒙) 신화를 전하는 자료는 다양한 계통이 있다. 크게 나누어 보면 첫째, 고구려 당시에 작성된 자료인 고구려 금석문에 전해지는 주몽 신화이다. ‘광개토왕비’와 ’모두루 묘지(墓誌)’에 전해지는 주몽 신화가 그것이다. 둘째, 고구려 당대의 기록이지만 중국 측에서 전해지는 주몽 신화로서, 『위서』 고구려전을 비롯하여 『주서』⋅『수서』 고려전에 수록되어 있다. 그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건국 신화를 전하는 것은 『위서』 고구려전이다. 셋째, 국내에 전승되는 문헌 자료 중에 보이는 주몽 신화로서, 주몽 신화를 전하는 국내 전승 자료는 『동명왕편』에 인용된 「구삼국사」의 전승,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그리고 『삼국유사』에 전해지는 주몽 신화가 있다.

〔사료 2-2-01〕 광개토대왕비 소재 주몽 신화

옛적 시조 추모왕(鄒牟王)이 나라를 세웠는데 (王은) 북부여(北夫餘)에서 태어났으며, 천제(天帝)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따님이었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는데, 태어나면서부터 성스러운 ……이 있었다(5자(字) 불명(不明)). 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부여의 엄리대수(奄利大水)를 거쳐가게 되었다. 왕이 나룻가에서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며 하백(河伯)의 따님을 어머니로 한 추모왕(鄒牟王)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이 무리를 짓게 하여라.”라고 하였다. 말이 끝나자마자 곧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 떼가 물 위로 떠올랐다. 그리하여 강물을 건너가서, 비류곡(沸流谷) 졸본(忽本) 서쪽 산 위[山上]에 성(城)을 쌓고 도읍(都邑)을 세웠다. 왕이 왕위(王位)에 싫증을 내니, (하늘님이) 황룡(黃龍)을 보내어 내려와서 왕을 맞이하였다. (이에) 왕은 졸본(忽本) 동쪽 언덕에서 용(龍)의 머리를 디디고 서서 하늘로 올라갔다. 유명(遺命)을 이어받은 세자(世子) 유류왕(儒留王)은 도(道)로써 나라를 잘 다스렸고, 대주류왕(大朱留王)은 왕업(王業)을 계승하여 발전시키었다.

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郞. 剖卵降世, 生而有聖□□□□. □命駕, 巡幸南下, 路由夫餘奄利大水. 王臨津言曰,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郞, 鄒牟王. 爲我連葭浮龜, 應聲卽爲連葭浮龜. 然後造渡, 於沸流谷忽本西, 城山上而建都焉. 不樂世位, 因遣黃龍來下迎王. 王於忽本東罡, 履龍頁昇天.顧命世子儒留王, 以道興治, 大朱留王紹承基業.

출처: 한국 금석문 종합 영상 정보 시스템

광개토왕비 건국 신화의 개요

주몽 신화를 언급하고 있는 고구려의 금석문 자료는 위에서 제시한 ‘광개토왕비’의 주몽 신화가 기본이며, 이 외에는 ‘모두루 묘지’에 포함된 “하백의 손자이고 일월의 아들인 추모성왕은 본래 북부여에서 나왔다 (河泊之孫 日月之子 鄒牟聖王 元出北夫餘)”, “하박(하백)의 손자 일월의 아들이 태어난 곳 (河泊之孫 日月之子 所生之地)” 등 단편적인 내용만이 전한다. 414년에 건립된 ‘광개토왕비’의 주몽 신화는 현재 전하는 가장 오래 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광개토왕비’에는 주몽의 계보와 출생, 남하 과정, 건국 등이 매우 간략히 기록되어 있지만, 5세기 당대 고구려인의 시조에 대한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위의 ‘광개토왕비’에는 시조 추모왕과 2대 유류왕, 3대 대주류왕만을 언급하고 있다. 이는 이들 세 왕이 고구려 건국의 주인공으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좋은 예이다. 실제로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보이는 건국 설화는 주몽왕 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용상 대무신왕의 부여 정벌과 대소의 죽음, 부여의 멸망 사실까지 이어진다. 즉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광개토왕 대에는 이미 고구려 건국 설화의 기본 틀이 완성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이 ‘광개토왕비’의 주몽 신화가 당시에 전승되던 내용을 모두 기록한 것은 아닐 터이고, 왕실의 신성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필요한 부분만 기술한 것임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구체적인 내용은 아래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의 건국 신화 해설을 참고하기 바란다.

▣ 추모왕, 유리왕, 대주류왕의 왕명

광개토왕비’에는 초기 세 왕의 왕명을 추모왕(鄒牟王)⋅유류왕(儒留王)⋅대주류왕(大朱留王)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들 왕호를 5세기 대의 공식적인 왕명으로 볼 수 있겠는데,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는 이들 세 왕을 동명성왕(東明聖王)⋅유리명왕(琉璃明王)⋅대무신왕(大武神王)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 이들 세 왕의 왕명은 언제 바뀐 것일까?

일단 ‘광개토왕비’에 나오는 추모(鄒牟)와 유류(孺留)는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의하면 각각 왕의 이름[諱]이다. 즉 5세기 대의 왕호는 왕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대무신왕의 이름은 무휼(無恤)로 전하기 때문에, 주류왕(朱留王)이라는 왕호는 이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기 어렵다. 다만 『삼국유사』 「왕력」에는 ‘미류(味留)’라는 이름이 전하는데, 이는 ‘주류왕(朱留王)’이라는 왕호의 착오일 수도 있지만, ‘주류(朱留)’가 또 다른 이름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더욱이 앞의 추모왕(鄒牟王)과 유류왕(儒留王)의 경우 생시의 이름이 왕호로 사용되었음을 보면, 이 두 왕과 함께 건국 초기의 위대한 왕으로 인식된 주류왕이라는 왕호도 이름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광개토왕비’에 전하는 왕호와는 다른 「본기」에 전하는 동명성왕⋅유리명왕⋅대무신왕이라는 왕호는 언제 정해진 것일까? 일단 추모왕(鄒牟王), 추모성왕(鄒牟聖王)으로 기록된 ‘광개토왕비’와 ’모두루 묘지’가 작성된 시점 이후일 터이기에, 대략 평양 천도 이후가 될 것이다. 그런데 동명성왕의 경우를 보면, 고구려 말기까지도 외국에 추모왕(鄒牟王; 주몽(朱蒙))으로 전해지던 예가 많다. 그러나 현전하는 고구려의 동명왕 전승 자료가 없다고 해서 고구려 당대에 동명성왕(東明聖王)으로 칭해졌을 가능성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더욱 동명이 전 부여족의 시조로서 추숭되고 있기 때문에, 부여의 정통성을 계승하였다고 자부하는 고구려로서는 시조 추모왕의 왕호를 동명왕(東明王)으로 개칭하였을 가능성을 충분히 상정할 수 있다.

유리명왕(琉璃明王)과 유류왕(儒留王)의 경우에는 같은 발음이지만 다른 글자[同音異語]로 씌어진 왕호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유리(琉璃)’가 불교 용어라는 점을 염두에 두면, 이 역시 의도적으로 왕호를 바꾸었을 개연성도 부정하기 어렵다. 또한 대무신왕(大武神王)이라는 왕호는 대주류왕(大朱留王)과는 그 어떤 연관성도 찾기 어렵지만, 대무신왕의 ‘무(武)’라는 한자식 표현을 대무신왕의 업적으로 찬양되는 부여 정벌과 관련해서 볼 수 있기 때문에, 왕의 특성을 드러내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왕호를 바꾸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동명성왕⋅유리명왕⋅대무신왕은 의도적인 추숭 과정에서 5세기의 왕호와는 다른 별도의 왕호로 불리게 되었음을 추리할 수 있다.

그리고 동명성왕⋅유리명왕⋅대무신왕 이렇게 세 왕호에만 다른 왕과는 달리 ‘성왕(聖王)⋅명왕(明王)⋅신왕(神王)’이라는 미칭이 추가된 점도 눈길을 끈다. 동명성왕의 ‘성왕(聖王)’이라는 표현을 보자면, ’모두루 묘지’에서 ‘추모성왕(鄒牟聖王)’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모두루 묘지’에는 고국원왕도 ‘국강상성태왕(國岡上聖太王)’, 광개토왕도 ‘국강상대개토지호태성왕(國罡上大開土地好太聖王)’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성왕(聖王)’이라는 표현은 ‘광개토왕비’나 호우총 출토 호우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장수왕 초년에는 사용하지 않다가 어느 시기엔가 이러한 미칭을 사용하면서 ’모두루 묘지’에도 이러한 표현이 나타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모두루 묘지’ 추모성왕(鄒牟聖王)의 예에서 보듯이, 장수왕 대에는 여전히 동명성왕이 아닌 추모성왕으로 표현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동명성왕⋅유리명왕⋅대무신왕이라는 왕호의 사용은 보다 후대의 일일 터이고, 이러한 왕호에서 간취되듯이 세 왕에 대한 추숭이 더 한층 강화되던 시기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모두루 묘지(1)
출처: 한국 금석문 종합 영상 정보 시스템
모두루 묘지(2)
모두루 묘지(3)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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