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로 본 한국사한국의 건국 신화 읽기2. 고구려의 주몽 신화 읽기2) 고구려 주몽 신화의 전승 자료와 내용

나. 『위서』 권 100, 열전 88 고구려

〔사료 2-2-02〕 『위서』 고구려전 소재 주몽 신화

고구려는 부여(夫餘)에서 나왔다. 스스로 말하기를 선조는 주몽(朱蒙)이라고 하였다. 주몽의 어머니는 하백녀(河伯女)로, 부여(夫餘) 왕에 의해 방 안에 갇히게 되었다. 햇빛이 비치자 몸을 이끌고 피하였는데, 햇빛이 다시 따라왔다. 얼마 후 잉태하여 알을 하나 낳았는데, 크기가 닷 되들이만 하였다. 부여 왕이 그 알을 버려 개에게 주었으나 먹지 않았다. 알을 버려 돼지에게 주었으나 먹지 않았다. 길에다 버렸으나 소와 말들이 피하였다. 나중에 들에 알을 버리자 새들이 깃털로 그 알을 감싸 주었다. 부여 왕이 그 알을 쪼개려 하였으나 깨뜨릴 수 없었다. 마침내 그 어미에게 돌려주었다. 어미는 물건으로 알을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다. 드디어 한 사내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다. 그가 자라자 이름을 주몽(朱蒙)이라고 하였는데, 부여 말로 주몽이란 활을 잘 쏜다는 뜻이다.

부여 사람들이 주몽은 사람의 소생이 아니라 장차 딴 뜻을 품을 것이라며 그를 없애고자 청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고 그에게 말을 기르게 하였다. 주몽은 매양 몰래 시험하여 좋은 말과 나쁜 말이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준마는 먹이를 줄여 마르게 하고, 둔한 말은 잘 길러 살찌게 하였다. 부여 왕이 살찐 말은 자기가 타고 마른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그 뒤에 들에서 사냥할 때 주몽에게는 활을 잘 쏜다고 하여 한 개의 화살만 주었다. 주몽은 비록 화살은 적었으나 잡은 짐승은 매우 많았다. 부여의 신하들이 또 그를 죽이려고 하였는데 주몽의 어머니가 몰래 알아차렸다. 그녀는 주몽에게 말하기를 “나라에서 장차 너를 해치려 한다. 너에게는 재주와 지략이 있으니 어디로든 적당한 곳으로 멀리 떠나거라.” 하였다.

주몽은 이에 오인(烏引)⋅오위(烏違) 두 사람과 함께 부여를 버리고 동남쪽으로 도망하였다. 길을 가다가 큰 강을 만났는데, 건너려 하여도 다리가 없었다. 부여 사람들의 추격은 매우 급박하였다. 주몽이 물에 고하기를 “나는 태양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오늘 도망치다가 추격하는 병사가 거의 쫓아 오니, 어찌 하면 건널 수 있을까?” 하였다. 이때 물고기와 자라가 함께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주몽이 건넌 뒤 물고기와 자라는 금방 흩어져 추격하는 기병들은 건너지 못하였다.

주몽이 보술수(普述水)에 이르러 세 사람을 만났다. 한 사람은 삼베 옷(麻衣)을 입고, 한 사람은 승려의 옷(納衣)을 입고, 한 사람은 마름 옷(水藻衣)를 입고 있었다. 주몽은 그들과 더불어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러 그곳에 거주하였다.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고 이로 인하여 성(姓)으로 삼았다.

처음에 주몽이 부여에 있었을 때 부인이 임신 중이었다. 주몽이 도망한 뒤 아들을 낳으니, 처음에는 이름을 여해(閭諧)라고 하였다. 자라서 주몽이 왕이 되었음을 알고, 그의 어머니와 도망하여 왔다. 그의 이름을 여달(閭達)이라 부르고, 나라의 일을 맡겼다. 주몽이 죽자 여달이 왕이 되었다. 여달이 죽자 아들 여율(如栗)이 뒤를 이었고, 여율이 죽자 아들 막래(莫來)가 왕이 되었다. 막래가 부여를 정벌하니 부여가 크게 패배하여 마침내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高句麗者, 出於夫餘. 自言先祖朱蒙. 朱蒙母河伯女, 爲夫餘王閉於室中. 爲日所照, 引身避之, 日影又逐. 旣而有孕, 生一卵, 大如五升. 夫餘王棄之與犬, 犬不食. 棄之與豕, 豕又不食. 棄之於路, 牛馬避之. 後棄之野, 衆鳥以毛茹之. 夫餘王割剖之, 不能破. 遂還其母. 其母以物裹之, 置於暖處. 有一男破殼而出. 及其長也, 字之曰朱蒙. 其俗言朱蒙者, 善射也. 夫餘人以朱蒙非人所生, 將有異志, 請除之, 王不聽, 命之養馬. 朱蒙每私試, 知有善惡. 駿者減食令瘦, 駑者善養令肥. 夫餘王以肥者自乘, 以瘦者給朱蒙. 後狩于田, 以朱蒙善射, 限之一矢. 朱蒙雖矢少, 殪獸甚多. 夫餘之臣又謀殺之, 朱蒙母陰知. 告朱蒙曰, 國將害汝. 以汝才略, 宜遠適四方. 朱蒙乃與烏引⋅烏違等二人, 棄夫餘, 東南走. 中道遇一大水, 欲濟無梁. 夫餘人追之甚急. 朱蒙告水曰, 我是日子, 河伯外孫. 今日逃走, 追兵垂及, 如何得濟. 於是魚鼈並浮, 爲之成橋. 朱蒙得渡, 魚鼈乃解, 追騎不得渡. 朱蒙遂至普述水, 遇見三人. 其一人著麻衣, 一人著納衣, 一人著水藻衣. 與朱蒙至紇升骨城, 遂居焉. 號曰高句麗, 因以爲氏焉. 初, 朱蒙在夫餘時, 妻懷孕. 朱蒙逃後生一子, 字始閭諧. 及長, 知朱蒙爲國主, 卽與母亡而歸之. 名之曰閭達, 委之國事. 朱蒙死, 閭達代立. 閭達死, 子如栗代立. 如栗死, 子莫來代立, 乃征夫餘, 夫餘大敗, 遂統屬焉.

▣ 『위서』 고구려전 주몽 신화의 개요

중국 측 사서(史書)에 전하는 주몽 신화는 『위서』 고구려전의 기사가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가장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주서』와 『북사』 고려전에도 주몽 신화가 전해지지만 그 내용이 소략하고 전체 줄거리가 『위서』의 그것과 별 차이가 없다. 아마도 『위서』의 기사를 축약하여 게재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따라서 주몽 신화를 분석할 수 있는 중국 측 문헌 자료는 『위서』 고구려전이 그 기본을 이룬다.

『위서』는 북제(北齊)의 위수(魏收)가 554년에 편찬한 사서로서, 고구려전에는 그 이전의 사서에서는 볼 수 없던 자료들이 많이 들어 있다. 이는 북위와 고구려의 활발한 교섭의 결과로 보이며, 특히 435년 이오(李敖)가 사절로 고구려를 방문하여 수집한 자료에 힘입은 바 적지 않으리라 추정된다. 그 중에서도 전혀 새로운 자료이면서 상당한 비중으로 기술된 것이 건국 신화로서의 주몽 신화와, 여기에 이어지는 고구려의 왕계이다. 이 새로운 자료가 『위서』에 나타나게 된 데에는 당시 고구려가 국가 체제를 정비하면서 새롭게 건국 시조로부터 이어지는 왕실의 권위를 내세우고 이를 대외적으로 표방한 결과로 보인다.

즉 『위서』 고구려전의 주몽 신화는 ‘광개토왕비’와 거의 같은 5세기 전반에 고구려에서 전승되던 주몽 신화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러한 점에서 ‘광개토왕비’의 주몽 신화와 비교 검토할 필요가 있다. 더욱이 ‘광개토왕비’보다 내용상으로 더 풍부하여 주몽의 잉태⋅출생 과정과 부여에서 겪었던 고난, 남하 시의 수⋅종자 및 건국 과정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중국 측 자료에 보이는 주몽 신화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부여의 건국 신화인 동명 신화와 매우 유사한 내용과 구성 요소를 갖추고 있음에도, 그 주인공은 동명(東明)이 아닌 주몽(朱蒙)이 등장한다. 즉 중국 측 전승 자료에서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부여의 시조는 ‘동명’으로, 고구려의 시조는 ‘주몽’으로 엄격히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위 『위서』의 건국 신화는 전체적으로 고구려 본기 등 국내에 전승되는 건국 신화의 내용과 서술 구조가 거의 일치하므로, 별도로 검토하지 않겠다. 아래 고구려 본기 및 「구삼국사」의 해설을 참고하기 바란다.

▣ 여해(閭諧)=여달(閭達), 여율(如栗), 막래(莫來)

『위서』에 보이는 고구려 건국 신화는 내용상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건국 신화의 줄거리와 큰 차이가 없다. 그런데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은 주몽 이후의 왕계(王系)이다. ‘광개토왕비’에도 유류왕(儒留王)-대주류왕(大朱留王)으로 왕계를 밝히고 있으며, 고구려 본기에는 유리명왕-대무신왕으로 되어 있어 서로 일치한다. 그런데 『위서』에는 여해(閭諧)=여달(閭達)-여율(如栗)-막래(莫來)로 되어 있다. 여해는 유리왕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한데, ‘유리’라는 이름과는 그 발음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 막래가 부여를 정복하였다는 내용으로 보아 그 행적이 대무신왕과 일치한다. 그렇다면 『위서』에는 여율이라는 새로운 왕이 추가되어 있는 셈이다.

그런데 고구려의 5대 왕은 모본왕(慕本王)이다. 이 ‘모본(慕本)’과 ‘막래(莫來)’의 글자 모양이 유사하다. 따라서 막래를 모본왕으로 본다면, 부여 정벌의 기사는 여율에 해당하는 기사가 될 것이다. 『위서』를 서술하는 과정에서 잘못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추정이 옳다고 하더라도, 여해(閭諧)=여달(閭達)-여율(如栗)-막래(莫來)라는 이름이 다른 자료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이름이므로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 보술수(普述水)와 흘승골성(紇升骨城)

주몽이 남하하면서 세 사람을 만난 보술수는 고구려 본기에는 모둔곡(毛屯谷)으로 되어 있다. 동일한 지명을 다르게 표기한 것으로 보이는데, 아마도 보술수는 강 이름을, 모둔곡은 강을 끼고 있는 골짜기 지역의 이름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흘승골(紇升骨)은 고구려 본기에는 ‘졸본(卒本)’으로, ‘광개토왕비’에는 ‘비류곡(沸流谷) 졸본(忽本)‘으로 되어 있다. 흘(紇)과 졸(卒, 忽)은 발음이 통하고, 승(升)과 본(本)은 글자 모양이 유사하다. 따라서 흘승(紇升) 혹은 흘승골(紇升骨)은 졸본(卒本, 忽本)과 동일한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광개토왕비’에서는 “비류곡(沸流谷) 졸본(忽本) 서쪽 산 위[山上]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흘승골성은 지금 중국 요녕성 환인시 오녀 산성에 비정된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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