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로 본 한국사이야기 고려사1. 고려 초기의 정치 이념3) 훈요십조 이야기

나. 고비마다 되살아나는 끈질긴 생명력

훈요는 전 고려 시대를 통하여 주요 정치 현안을 해결하거나 정책을 판단하고 결정을 내릴 때의 유용한 기준 내지 원칙으로서, 국왕이나 관료 집단에게 널리 이용되었습니다. 훈요는 이같이 고려 왕조 건국자인 태조 왕건의 사상과 정책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정치 사상사 연구의 기초 자료로서 매우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글은 이러한 문제들을 정리하고자 시작되었으며, 이러한 작업은 훈요가 일제 식민사학자의 주장처럼 위작되지 않았다는 유력한 실증적인 근거를 찾는 길이 될 것입니다.

인종(1123-1146년 재위)은 잦은 기상 재변이 일어나자, 신하들에게 그 대책을 위한 구언소(求言疏)를 올리게 했습니다. 중국에서 귀화하여 관료로 활약했던 임완(林完)의 상소가 그의 열전에 실려 있는데, 그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료 1-3-05〕 『고려사』 권 98 임완 열전

“폐하께서 근면하여 어찌 실(實)로써 응하지 아니합니까. 실(實)로써 힘씀은 지금의 폐해를 고치는 데 있고, 지금의 폐해를 고침은 태조의 유훈(遺訓)을 따름에 있으며, 문종(文宗)의 구전(舊典)을 거행(擧行)할 뿐입니다. 태조의 유훈은 그 상세함을 신이 얻어듣지 못하였으나 엎드려 생각건대 그 당시 요란함을 다스려 바른 데 돌리고 기강을 베푼 것은 반드시 신성한 꾀와 밝은 계책이 국사에 실려 있는 것을 가히 고찰하여 알 수 있습니다.”

임완은 잦은 재변을 없애는 대책으로 태조의 유훈을 따르고, 문종의 정책을 따르도록 주문했습니다. 임완의 상소는 재변에 대한 대책으로 작성된 것이지만, 실제로는 재변에 대한 대책문을 통해 우회적으로 인종묘청 일파의 말을 들어 그곳에 궁궐을 짓고 서경에 자주 행차하여 새로운 정치를 도모하는 것을 비판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위의 글에서 임완은 태조훈요를 직접 보지 못했으나, 훈요의 정신을 따르는 것이 재변을 막고 서경 세력으로 기울어진 인종의 정치를 바로잡는 길임을 강조했습니다. 임완이 이같이 말한 것으로 보아, 훈요는 당시 관료 사회에 널리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예종(1106-1122년 재위)은 원년(1106) 7월 신하들이 올린 상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답을 내립니다.

〔사료 1-3-06〕 『고려사』 권 12 예종 원년 7월

“짐이 양부(兩府)⋅대간(臺諫)⋅양제(兩制) 및 장령전 수교원(讐校員) 등의 봉사(封事)를 보니, 그 논한 바를 몸소 행하고 스스로 반성하며 조종의 유훈을 받들어 계승하라 한 것은 이미 마음에 두고 잊지 않고 거의 실행하였다.”

당시 관료들이 예종에게 훈요의 정신에 입각한 정치를 요구한 것으로 판단되며, 예종 역시 훈요 정신을 바탕으로 한 정치를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로 보아 훈요는 당시 정국에서 정책 판단이나 결정의 근거로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훈요는 전 고려 시대를 통하여 정치 현안이나 정책 결정을 내릴 때 주요 지침이나 원칙으로 활용되었습니다. 이는 매우 주목되는 사실이며, 훈요가 일본인 학자가 주장하듯이 위작이 아니라는 또 다른 증거가 됩니다. 예를 들어 보기로 하겠습니다.

문종(1047-1082년 재위)이 1056년 덕수현을 옮기고 그곳에 흥왕사를 창건하려 하자, 당시 재상 최유선(崔惟善)은 이에 대한 반대 주장을 다음과 같이 피력합니다.

〔사료 1-3-07〕 『고려사』 권 95 최유선 열전

“우리 태조 신성왕(神聖王)의 훈요에 말하기를, ‘국사 도선이 국내 산천의 순역(順逆)을 관찰하여 무릇 사원을 창조할 만한 땅에는 짓지 않음이 없으니, 후세의 국왕 및 공후⋅귀척(貴戚)⋅후비⋅신료들이 다투어 사원을 지어 지덕(地德)을 훼손하지 말라.’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폐하가 조종(祖宗)의 쌓인 기업(基業)을 이어받아 태평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마땅히 비용을 절약하고 사람을 사랑하며 성대한 운세를 지켜 후세에 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백성의 재산과 힘을 소비하고 불필요한 일에 허비하여 나라의 근본을 위태롭게 하십니까.”

도선이 풍수지리에 입각하여 창건한 사원 외에 함부로 사원을 짓는 것은 지덕을 훼손하는 것이라는 훈요 제2조에 근거하여, 최유선은 문종의 흥왕사 창건을 반대한 것입니다.

훈요 제2조를 근거로 사원 남설(濫設)을 비판한 자료는 다음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료 1-3-08〕 『고려사절요』 권 13 명종 26년 5월 조

태조 때 반드시 산천의 순역을 보아 사찰을 세워 지리에 따라 편안히 하였는데, 후대에 와서는 장상(將相), 관료와 무뢰한 승려들이 산천의 길흉을 따지지 않고 절을 세워 원당(願堂)이라 하며, 지맥을 손상시켜 재변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폐하께서 음양관으로 하여금 조사하게 하여 비보 사찰 외에는 모두 제거하여 후세 사람들이 본보기를 삼지 말게 하십시오.”

순천 선암사 소장 도선국사 진영
출처: 문화재청

최충헌이 1196년(명종 26) 권신 이의민을 제거한 후 국왕에게 올린 상소, ‘봉사십조(封事十條)’ 가운데 한 조항입니다. 무신 권력자까지도 훈요에 근거하여 국왕의 정치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종 원년(1106)에 국왕은 부왕 숙종의 화폐 유통 정책을 계승하려는 조서를 내립니다.

〔사료 1-3-09〕 『고려사』 권 79 식화 2 화폐 예종 1년 조

“전법(錢法)은 옛 제왕이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백성을 편리하게 하고자 한 것이며, 우리 선고(先考; *숙종)께서 재화를 늘리고자 한 것은 아니다. 하물며 거란도 근년에 또한 전폐(錢幣)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무릇 한 법을 세우면 여러 비방이 따라 일어난다. 그런 까닭에 백성은 그 처음 시작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데, 뜻밖에도 군신(群臣)이 태조의 유훈을 빌려 당나라와 거란의 풍속을 쓰는 것을 금한다는 설로 전폐 사용을 배척하고 있다. 그러나 그 금한 바는 대개 풍속이 화려하고 사치함을 말할 따름이요, 문물과 법도 같은 것은 중국을 버리고 무엇으로 할 것인가.”

신하들은 “당나라와 거란의 문물과 예악을 반드시 따를 필요가 없다.”라는 훈요 제4조를 내세워 예종의 화폐 유통 정책에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종은 훈요 제4조의 취지는 중국의 문물과 법도를 따르되, 화려하고 사치한 풍조를 따르지 말라는 것으로 해석하면서, 화폐 유통은 본받아야 할 대상이라 했습니다. 화폐 유통의 찬반 논의가 훈요 제4조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이루어진 점은 대단히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인종 때 이자겸이 국정을 전횡하자, 최기우(崔奇遇)는 국왕이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를 가까이하고 학사 대부(學士大夫)를 멀리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태조의 유훈을 따르라고 권고합니다.

〔사료 1-3-10〕 『고려사』 권 98 최기우 열전

“항상 편전(便殿)에 거동하여 자주 유신(儒臣)을 맞아 고금을 살피고, 양부(兩府)를 인견(引見)하여 국사를 자문하는 등 한결같이 태조의 유훈을 따르십시오.”

“국왕은 민심을 얻기 위해 신하의 충실한 간언(諫言)을 따르고 남을 비방하는 참언(讒言)을 따르지 말라.”는 훈요 제7조에 근거하여, 당시 정치를 비판했던 것입니다.

명종 7년(1177) 1월 별자리 형혹(熒惑)이 궤도(軌道)를 잃는 성변(星變)이 일어나고, 안개 기운이 혼탁하며, 달과 태양이 빛을 잃는 재변이 일어났습니다. 국왕 명종이 이를 없애려는 기양재(祈禳齋)를 올리려 하자, 태사국(太史局) 관원들은 태조의 유훈에 따라 국왕이 몸을 삼가고 덕을 닦는 것이 재변을 멈추는 일이라 하며 국왕을 비판합니다(『고려사』 권 48 천문 2 성변(星變) 조). 역시 훈요 제7조에 근거하여 신하들이 국왕의 행위를 비판한 것입니다.

훈요는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주로 관료 집단이 국왕의 정치를 비판하거나, 주요 정치 현안에 대한 판단의 근거로 이용하고는 했습니다. 국왕 또한 자신의 정치를 합리화하기 위해 훈요를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의종(1147-1170년 재위)서경을 중시한 훈요의 정신에 따라 왕실과 왕권의 강화를 위해 서경에 행차하여 새로운 정치를 펼치려 했습니다. 다음의 기록에 그러한 사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료 1-3-11〕 『고려사』 권 18 의종 22년 3월

“짐이 듣건대 호경(鎬京; 서경)은 만세에 걸쳐 쇠하지 않는 땅이다. 뒷날 국왕이 이곳에 가서 신교(新敎)를 반포하면 나라의 풍속이 맑아지고, 백성이 편안하다고 한다. 짐이 즉위하여 정사를 펼친 이래 모든 일들이 너무 번거로워 서경에 갈 틈을 얻지 못했다. 이에 일관(日官)의 건의에 따라 이곳에 왔다. 장차 낡은 것을 고치고 새로운 것을 정하여[革舊鼎新] 다시 왕화(王化)를 부흥하고자 한다. 이에 옛 성인이 권계(勸戒)한 유훈과 현재 민폐를 구제할 사무(事務)를 채택하여 신령(新令)을 반포한다.”

의종은 “매년 국왕이 서경에 가서 머물면 왕조의 안녕을 이룰 수 있다.”라는 훈요 제5조를 내세워, 서경에서 새로운 정치 정책을 담은 신령을 반포하여 국정을 새롭게 하려는 의지를 보입니다. 또한 인종 역시 훈요 제5조에 근거하여 서경에 대화궁(大華宮)을 짓는다고 했습니다.(『고려사』 권 16 인종 10년 12월)

한편 명종(1171-1197년 재위)은 자신을 이어 국왕에 즉위할 신종의 책봉을 위해 금나라에 보내는 표문에서 동생인 신종이 즉위하게 된 근거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사료 1-3-12〕 『고려사』 권 21 신종 즉위 10월

“돌이켜 생각하건대 모름지기 가업(家業)은 아우에게로 전하라는 부왕(父王; *인종)의 말씀이 귀에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도 일찍이 신의 형(*의종)에게서 부탁을 받았습니다. 이제 마땅히 무겁고 어려운 일[重艱]을 신의 아우(*신종)에게 넘겨주고자 합니다. 하물며 신의 형(*효령 태자(孝靈太子))에게 원자(元子)인 신(臣) 모(某)가 있으나, 일찍 유훈을 전해 듣고, 또한 신의 마음에 순종하여 말하기를, ‘대숙(大叔)의 현명함을 따르지 못하겠으니, 원컨대 연릉(延陵)의 절(節)에 부쳐 주소서.’라며 굳이 사양하고 있습니다. 신의 모제(母弟)인 왕탁(王晫; *신종)의 덕은 인심을 감복시키고 명망은 척리(戚里)에 높습니다.”

명종은 이의민을 제거하는 쿠데타로 실권을 장악한 최충헌에 의해 폐위되었는데, 폐위 직후 아우인 신종에게 양위하는 형식을 취하여 금나라에 위와 같이 신종의 즉위를 요청하는 표문을 올렸던 것입니다. 인종의 동모제(同母弟)인 의종-명종으로 이어지는 왕위의 형제 계승이 역시 동모제인 신종에게까지 이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형제 계승의 근거이자 신종 즉위의 명분을, “만약 원자(元子)가 어질지 못하면, 형제 중에서 여러 사람의 추대를 받는 자에게 왕위를 계승하게 하라.”라는 훈요 제3조에서 찾았던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훈요는 당시 국왕과 신하들에게 상당히 널리 유포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고려의 지배층은 훈요의 정신에 입각하여 정치 현안을 검토하고, 정책을 결정하였습니다. 훈요가 위작이 아니라는 또 다른 증거는 이러한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창닫기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