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로 본 한국사잡록(雜錄)⋅필기(筆記)류 자료를 통해 본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2. 중인의 삶

1) 최상층 중인 역관과 의관

중인(中人)은 조선 사회에 존재했던 특수한 계층이다. 중인이라는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양반상민의 중간에 속한 중간 계층이라는 의미에서 중인으로 불렸을 가능성이 크다. 중인에는 여러 부류들이 속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최상층에 위치한 이들은 잡과(雜科)를 통해 선발된 역관(譯官)⋅의관(醫官)⋅일관(日官)⋅율관(律官) 등의 기술직 관원이었다. 기술직 관원 가운데도 핵심적인 자리는 역관과 의관이었다.

역학과 의학은 상당한 전문적 지식이 필요하고 담당하는 업무도 중요하였기 때문에 역관과 의관 중에는 능력을 갖춘 인물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 사회에서 잡과 출신자는 문과 출신자에 비해 차별을 받았다. 일단 잡과 출신 중인은 법적으로 ‘한품거관(限品去官)’이라는 규정의 적용을 받았다. 한품거관은 일정한 관품에 오르면 관직에서 물러나는 것을 말하는데 기술직 중인의 경우 정3품 당하관에서 실직이 끝나게 되어 있었다. 또한 기술직 중인은 정식 과거잡과를 통해 선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제수된 관직은 정직(正職)이 아니라 몇 개월 단위로 교체되는 체아직(遞兒職)이었다. 체아직은 재직하는 동안에만 녹봉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기술직 중인은 어엿한 관직자임에도 불구하고 생활이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기술직 중인의 관심은 경제적인 문제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한 상황은 다음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사료 2-1-01〕

역관당상관으로 진급하면 영광스럽다고 할 만한데도 동료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자를 꾸짖을 때는 반드시 “너는 지지리도 복이 없으니 빨리 당상관이나 되어라.”라고 한다. 당상관이 되면 중국으로 갈 기회가 드물어져서 당하관보다 이득이 적기 때문이다.

고상안(高尙顔, 1553~1623), 『효빈잡기(效嚬雜記)』

당상관에 오르는 것은 모든 관료들의 꿈인데 역관들에게는 당상관에 오르라는 것은 일종의 욕이었다는 것이다. 당상관이 된다고 해도 양반들과 같은 위치에 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양반 집안이 될 수도 없기 때문에 현실적인 문제에 더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연행도」 제7폭
연행사 일행이 북경성의 동문인 조양문으로 들어가는 모습이다.
(소장 : 숭실대 기독교박물관)

역관의 경우 당상관이라는 지위보다 사행에 참여하여 경제적 이익을 취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역관들은 사행 기회가 오면 다양한 방법을 통해 자금을 모은 후 상인들과 결탁하여 무역에 종사하였다. 특히 청과 일본 사이의 중개무역이 활발히 진행되었던 17세 후반부터 18세기 초반 시기는 역관들의 전성기였다. 중국 사행에 참여한 역관들이 중국에서 물품을 구매해 와 상인들에게 넘기면 이들 물품은 왜학 역관(倭學譯官)을 매개로 일본에 수출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역관들은 막대한 이윤을 남길 수 있었다.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반 사이에는 무역으로 큰돈을 모은 역관들이 많았다. 이러한 역관 가운데 어떤 이들은 자신의 경제적 능력을 적극적으로 과시하기도 하였다. 박지원(朴趾源)의 『허생전(許生傳)』에 나오는 서울 최고 부자 변씨의 실제 모델로 잘 알려진 변승업(卞承業, 1623~1709)이 그런 경우이다. 그는 임금의 관에만 할 수 있는 옻칠을 자신의 부인의 관에 하였다.

〔사료 2-1-02〕

금상 병자년(1696)에 모 성을 가진 왜어 역관이 상처를 했는데 관에 옻칠을 해서 국상과 다름없이 했다. 재상과 간관들이 이를 듣고 괘씸하다고 생각했으나 역관이 수십만 금을 모았다가 요로에 모두 뿌렸던 까닭에 아무런 규탄을 받지 않고 무사했다. 식자들이 나라를 위해 매우 근심하고 탄식했다.

정재륜(鄭載崙, 1648~1723), 『공사견문록(公私見聞錄)』

변승업 집안은 희빈 장씨의 후견인이었던 장현(張炫, 1613~?)과 사돈 간이기도 했던 당대 최고의 역관 가문이었다. 개인적으로는 1645년(인조 23)에 역과에 합격하여 왜학 역관이 된 후 청과 일본 사이의 중개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변승업은 자신의 경제적 능력을 과시하고 싶었음이 분명하다.

반면 변승업과는 달리 자신의 능력을 되도록 숨기려고 하는 역관도 있었는데 김근행(金謹行, 1610~?)이 그러한 예이다. 김근행은 왜어 역관으로 1663년(현종 4) 유황과 무기의 밀수를 위해 일본에 들어가 밀매 상인과 접촉하여 유황과 무기 공급을 약속받는 등 활약을 했던 인물이다. 이러한 활약 덕분에 『통문관지(通文館志)』 「인물」조에도 소개되었다. 그는 부자로도 이름이 났었는데 일부러 의복은 검소하게 입고 찢어진 모자를 쓰고 다녔다고 한다. 주변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묻자 김근행은 화려한 물건을 가지고 있으면 주변 양반들이 갖고 싶어 할 것인데 주지 않으면 환심을 잃게 되고 고루 나누어 주자면 물건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김근행의 병이 깊어 세상을 떠나려고 할 때 명심할 만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김근행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고 한다.

〔사료 2-1-03〕

우리는 재상가와 교유하지 않으면 발신(發身)하지 못한다. 공경의 문에 나아가 안부를 묻고 인사를 올리는 것은 형세상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반드시 망할 것 같은 집에는 가볍게 나아갈 필요가 없으니 그 화가 우리에게 미치기 때문이다.

정재륜(鄭載崙, 1648~1723), 『한거만록(閑居漫錄)』

기본적으로 역관의 무역은 양반 관료의 비호 내지 묵인 없이는 이루어지기 힘든 것이기 때문에 역관은 관료들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때문에 김근행은 양반과의 관계에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한편 의관들은 내의원이나 전의감 등에 소속되어 의료 행위에 종사하였다. 이들 역시 생활이 불안정했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수입을 보충해야 했다. 의관들이 돈을 버는 가장 대표적인 방법은 일반인들에 대한 의료 행위였다. 별다른 의료 시설이 없던 당시에 의관들의 진료를 받으려는 사람들은 많았다. 특히 서울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부귀가들은 의관들의 주요한 고객이었다. 의관들은 이러한 부귀가를 찾아다니며 치료를 해 주고 많은 진료비를 받았다.

의관들은 또한 사행에도 참여하였는데 그럴 경우 역관들과 마찬가지로 약재 무역 등을 통해 큰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이 밖에 인삼이나 녹용과 같은 진상용 약재의 품질을 검사하는 심약(審藥)의 지위를 이용하여 부정한 방법으로 이익을 취하기도 하였다. 지방에 파견된 심약은 특정 삼상(蔘商)에게 뇌물을 받고 그들 삼상에게서 구한 인삼만 합격시키는 것이 대표적인 방법이다. 1798년(정조 22)의 기사에 따르면 본래 삼 1전(錢)의 값이 40냥으로 정해져 있는데 심약에게 바치는 뇌물 값 등이 포함되어 실제 삼 1전 값이 70냥도 넘었다고 한다. 심약이 상당한 양의 뇌물을 받아 챙겼음을 알 수 있다.

중인들 가운데 경제적 능력과 학문적 역량까지 갖춘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이 양반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주역으로 부상할 가능성은 충분하였다. 다음 자료를 한 번 보자.

〔사료 2-1-04〕

장붕익(張鵬翼, 1646~1735)이 한성부 판윤으로 있을 때 도로가 진창이 된다는 이유로 매양 마을 백성들에게 명하여 눈이 온 뒤에는 도로 양편의 진흙을 깎아 모아 가운데에 등성마루를 만들게 하였다. 그래서 이 당시에 ‘중간 길은 높고 양쪽 가는 낮다[中路高 兩班低]’는 노래가 있었다. 그 후 최씨와 이씨 두 성이 중로(中路) 출신으로 외람되게 번곤(藩閫)1)을 독점하였고 총사(摠使)2)에 임명되는 경우가 있게 되었다. 사대부 중 영락한 자로 예전의 문학 이저(李著, 1689~1737) 집안 같은 경우는 최씨 집안과 혼인하였으니 불행히도 노랫말에 가깝게 되었다.

심재(沈 , 1722~1784), 『송천필담(松泉筆談)』

‘중간 길은 높고 양쪽 가는 낮다’는 노래를 중인양반을 넘어서는 상황과 연결시키고 있음이 흥미롭다. 양반들은 중인의 성장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시대에 중인은 언제나 양반 아래에 위치할 수밖에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었다. 역관중인 가운데 최고의 위치에 있었지만 사행 때 수석 역관조차 사행사들에게 볼기를 맞았다. 그런 일이 자주 벌어지자 정조(正祖, 재위 1776~1800)가 나서 주의를 줄 정도였다. 중인은 조선의 제2인자들이었지만 양반과의 사이에는 여전히 넘기 어려운 높은 벽이 존재하고 있었다.

1)관찰사병사수사
2)5군영 중 총융청의 으뜸 벼슬인 총융사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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