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로 본 한국사형정풍속도(刑政風俗圖)를 통해 본 조선의 형정(刑政)4. 형정풍속도의 내용과 특징1) 오형(五刑)의 내용과 특징

가. 태장형

태장형(笞杖刑)은 일종의 신체형으로 회초리로 죄인의 볼기와 넓적다리를 때리는 형벌이다. 이는 죄의 경중에 따라 10회를 단위로 50회까지, 장형은 60회에서 100회로 각 5등급으로 집행하였다. 『흠휼전칙(欽恤典則)』에 따르면 태(笞)의 규격은 길이는 3척(尺) 5촌(寸)이며, 윗부분 두께는 2분(分) 7리(釐), 손잡이 두께는 1분 7리이고, 장(杖)의 규격은 3척 5촌이며, 윗부분 두께는 3분 2리, 손잡이 두께는 2분 2리이다. 〈도10〉처럼 태와 장은 그 모양과 길이에 큰 차이가 없고 굵기만 약간 차이가 날 뿐이어서 처벌의 기준이 매질의 횟수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도10〉 『흠휼전칙』 태장형구도

태형은 비교적 가벼운 경범죄에 적용되는데, 수령과 방백 등의 지방관이 직접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지만, 장형은 중범죄로 수령과 방백이 결안을 작성해 보고하면 형조를 거쳐 국왕의 재가를 받아 처벌하는 형벌이다. 태장형은 신체에 가해지는 형벌인 만큼 매질로 인한 죄인의 육체적 고통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이 형벌은 때때로 치명적이어서 매질로 난 상처가 감염되는 이른바 장독(杖毒)으로 죽는 이도 많았다. 또한 다산(茶山)이 『목민심서(牧民心書)』에 50대의 한도를 넘는 태형은 모두 남형(濫刑)이니 목민관으로서 절대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할 정도로 남용하는 사례가 많았다.

태장형은 육체적 고통은 물론이고 바지를 내리고 볼기를 내려야 하는 치욕도 감내해야 했다. 유교 윤리상 신체의 훼손은 곧 불효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양반에게 태장형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지극히 제한되었다. 따라서 1423년(세종 5)에 양반 관료가 십악(十惡), 살인(殺人), 장물(贓物), 행군(行軍) 등 중대 범죄 외의 태장형을 범했을 때 속전(贖錢)1)으로 신체형을 대신할 수 있도록 선처하는 규정이 마련되었다.

태장형에 관한 형정풍속도는 김윤보의 〈군수초달죄녀(郡守楚橽(撻)罪女)〉, 〈태벌죄녀(笞伐罪女)〉, 〈군수태벌죄인(郡守笞伐罪人)〉 등의 3점과 김준근의 〈죄인태장맞는모양〉, 〈태장치는모양〉 2점 등 총 5점을 확인할 수 있다.

〈도11〉과 같이 태장형은 형판에 죄인의 팔과 다리, 그리고 허리 등을 밧줄로 묶은 채 시행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행형 과정에서 죄수가 몸부림치는 것을 저지하고 정확한 부위를 가격하기 위한 조치인 동시에 신체의 제압을 통해 형벌의 엄중함을 과시하기 위한 의식과도 같은 절차였다.

『대명률(大明律)』에 따르면 태장형이 결정된 자는 “볼기와 넓적다리를 나누어 치”는데, 이때 죄인은 거의(去衣)라 하여 반드시 벌거벗겨 맨살을 때리도록 되어 있다. 이러한 규정에 따라 그림 속 죄수들도 저고리만 입히고, 바지는 발목까지 내린 채 처벌되는 모습이다. 그러나 〈도13〉, 〈도14〉처럼 여성은 남성과 달리 치마와 속바지를 입혀 여성의 수치심을 배려한 모습이 이채롭다. 그러나 여성일지라도 죄인인지라 매를 피할 수 없기에 바지를 볼기 아래까지 최대한 걷어 올려 처벌하고 있다.

태장형은 이처럼 여성에 대해 최소한의 관용을 베풀었지만, 그나마 간통한 여성에게는 이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1456년(세조 2) 양녀(良女) 출신 분경(分京)이란 여인은 이용수(李龍壽)라는 자에게 시집가기 위해 본 남편 최희(崔希)를 핍박하여 기별명문(棄別明文)2)을 받아 냈다. 마침내 분경은 이용수와 새로 혼인하여 그 목적을 달성했지만 불륜 사실을 알아챈 사헌부에 간통죄로 붙잡혀 거의 상태로 장(杖) 100대를 맞았다는 사실이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실려 있다.

〈도14〉는 군수가 여성 죄수를 회초리로 초달(楚撻)하는 상황으로 태형과 달리 죄인을 형판에 묶지 않고 그 위에 올라서게 한 후 종아리는 때리는 장면이다. 특히 죄인은 다리가 묶여 균형을 잡지 못한 듯 포졸을 껴안은 채 종아리를 맞는 어색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초달은 가시나무로 만든 회초리로 종아리를 때리는 형벌인데, 중국 고사에 따르면 “가시나무는 풍증(風症)을 제거하고 울혈(鬱血)을 발산시켜 매를 맞은 자가 비록 한기(寒氣)와 부딪쳐도 병이 나지 않았다.”고 알려졌다. 그래서 초달은 성왕(聖王)이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상징하는 도구로 알려졌는데, 요즘 말로 하면 ‘사랑의 매’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초달은 조선 시대에도 아동과 학도들의 비행과 학습 부진에 대한 체벌용으로 주로 이용되었으며, 간혹 신분이 낮은 관노와 관비의 간통을 단속하는 데 사용되기도 하였다.

한편 위의 그림에서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태장형의 집행사령(執杖使令)이 대부분 저고리의 오른쪽 소매를 벗고, 그 벗은 오른쪽 옷소매와 왼쪽 무릎까지 내려온 철릭의 끝자락을 허리춤 뒤로 묶은 채 매질을 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습관은 유사한 매질 장면에서도 대체로 확인되는데, 사소한 것이지만 그림이 아니면 확인할 수 없는 집행사령의 생동감 있는 모습이다.

1)벌금
2)이혼장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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