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로 본 한국사형정풍속도(刑政風俗圖)를 통해 본 조선의 형정(刑政)4. 형정풍속도의 내용과 특징2) 고문의 내용과 특징

가. 신장

범인 신문에서 현장에서 검거한 범인을 제외한 대부분의 용의자가 처음부터 범죄를 자백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수사 과정에서 죄상을 밝히려는 자와 숨기려는 자 간의 고도의 두뇌 싸움은 자주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조선 시대 범죄 수사에서 범인의 유죄를 입증하는 근거는 용의자의 자복(自服)만큼 중요한 것은 없었다. 자복은 승관(承款)이라고 하는데 범인이 자신 죄를 실토하고 뉘우친다는 의미로 일종의 자백을 이르는 말인데, 이를 받아 내지 못하면 범죄가 성립되지 않는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감시와 처벌』에 따르면 자백은 확실한 증거를 구성하기 때문에 다른 증거를 추가할 필요도 없고, 힘들게 증거를 조합할 필요도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 즉 자백 하나면 충분히 유죄가 성립된다는 뜻이다.

사극에서 수사관이 죄인의 자백을 받기 위해 ‘네 죄를 알렸다’, ‘네 죄를 이실직고 하렸다’라며 호령하고 윽박지르는 장면을 보았을 것이다. 이를 평문(平問)이라 부른다. 그런데 대부분의 용의자는 자신의 결백을 읍소하거나, 완강히 부인하는 경우가 많아 평문이 더 이상 먹히지 않을 때가 다반사다. 이때 자백을 받기 위해 공식적으로 허용된 고문이 형문(刑問)이었다. 형문은 신장(訊杖 또는 荊杖)을 사용하여 죄인의 정강이를 때리는 고문이다. 이때 사용되는 신장은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격이 명시되어 있는데, 길이는 태, 장, 추국신장, 삼성신장 등과 유사한 3척 3촌으로 표준화되었다. 다만 그 모양과 굵기에 차이가 있는데, 손잡이 부분은 둥글고 가늘며 가격 부위는 넓적하고 굵었다. 신장의 종류는 사용처에 따라 일반 신장, 추국신장, 삼성(의정부, 사헌부, 의금부)추국신장 등으로 구분된다. 추국(推鞫)은 국왕의 명에 따라 의금부에서 범인을 신문하는 것이고, 삼성추국(三省推鞫)은 강상죄(綱常罪)를 범한 자를 신문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일반 범죄와 달리 중대 범죄였기 때문에 신장의 규격 또한 일반 신장에 비해 넓이와 두께가 약간 큰 특징을 보인다.

〈표6〉 조선 시대 장류의 규격 비교

신장 대두경 소두경 출처 비고
태(太) 3척 5촌 2분 7리 1분 7리 『대명률』  
장(杖) 3척 5촌 3분 2리 2분 2리 『대명률』  
신장(訊杖) 3척 5촌 4분 5리 3분 5리 『대명률』 * 朝鮮 不用
* 볼기와 넓적다리를 침
3척 3촌 상, 1척 3촌, 則圓 7경 7분 하 2척, 則廣 8분, 후 2분 경국대전 * 무릎에서부터 정강이 사이를 때림
추국신장(推鞫訊杖) 3척 5촌 광 9분 후 4분 『속대전』  
삼성신장(三省訊杖) 3척 5촌 광 8분 후 3분 『속대전』  
* 전거 : 『흠휼전칙(欽恤典則)』 〈刑具之圖〉 참조.
〈도24〉 『흠휼전칙』 태장 형구도

『대명률』은 신장으로 칠 수 있는 부위를 볼기와 넓적다리로 규정하고 있지만, 그 폐단 때문에 조선에서는 1439년(세종 21) 무릎 아래부터 정강이 사이를 때리도록 조정하였다. 아마도 볼기 보다는 정강이 쪽이 고통 강도가 세고, 장독 등의 2차 피해가 덜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신장은 태장형과 달리 위협적이어서 1차에 30회를 넘길 수 없었고, 1번 집행하면 3일이 지난 다음 속개할 수 있도록 규정하여 그로 인한 인명 피해를 최소화하였다. 1738년(영조 14) 영조(英祖, 재위 1724~1776)경연석상에서 “방백이 눈앞에서 통쾌함에 취해 사람의 목숨을 경시하여 남형과 혹형을 쓰는 것”을 질타하면서, 형조에 명하여 교혈(校穴)1)을 주조하여 팔도에 보내 신장의 규격을 엄격히 시행할 것을 명령한 사례에서 보듯, 일선 현장에서 신장은 규격과 횟수가 엄격히 지켜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형정풍속도 가운데 신장에 관한 내용은 김윤보의 〈타형문(打刑問(打脛))〉과 김준근의 〈형추하고〉, 〈형문치는모양〉, 〈형문치고〉 등에서 볼 수 있다. 조선 초기의 신장은 죄인을 모로 눕혀 정강이를 치는 방식이었지만, 조선 후기에는 그림과 같이 죄수를 걸상에 앉혀 정강이를 때리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흔히 드라마에서 재연되는 심문 장면은 죄인을 형판에 엎어 놓고, 곤장으로 볼기를 치는 모습으로만 연출되고 있지만, 실상은 그림처럼 죄인의 정강이를 가격하는 방식이 더 정확하고 일반적인 고문 방식이었다. 여하튼 조선 시대 고문을 통해 고통을 가하는 신체는 대부분 정강이 부위로 일치되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압슬형, 주뢰형, 신장 등은 고문의 도구와 방식에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고통을 가하는 부위가 정강이에 집중되어 있다는 특징이 있다. 정강이를 차여본 사람이면 그 고통의 강도가 얼마나 센지 공감할 터인데, 대부분의 고문이 정강이에 고통을 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도25〉 김윤보, 타형문(打刑問), 『사법제도연혁도보(司法制度沿革圖譜)』
개인 소장
〈도26〉 김준근, 형취하고, 『기산 김준근 조선풍속도-스왈른 수집본』

〈도25〉, 〈도26〉과 같이 형문은 2인 1조로 시행하였는데, 한 사람은 한쪽 소매를 뺀 채 매질을 하고, 다른 사람은 뒤로 묶인 죄수의 팔 사이로 주장(朱杖)을 끼워 고정하고, 한 손으로는 그의 상투를 움켜잡아 단단히 고정하고 있는 모습이다. 죄수의 정강이는 매를 맞은 흔적이 역력하고 발 아래 바닥에는 부러진 신장 토막이 널려 있어 신문의 혹독함을 더욱 실감케 한다.

1)태⋅장의 표준으로 만들 틀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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