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3장 조선 전기 농업 발달과 농촌 사회 그리고 농민3. 벼농사 짓는 법과 밭작물 재배법

농사일과 농기구의 결합

조선 전기 15세기 농법의 양상을 살피는 작업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바로 농기구이다. 농기구는 농업 생산 활동에 사용하는 직접적인 생산 도구·생산 수단을 가리킨다. 농민들은 농사 현장에서 여러 가지 생산 도구 및 생산 수단을 축력(畜力)이나 인력(人力)을 주요 동력으로 이용하면서 사용하였다. 농기구의 구조와 구성 체계 그리고 재질 등의 측면에서 나타나는 일정한 변화와 발전은 곧장 농업 생산력 전반의 발달을 가져오는 요인이었다.416) 우리나라 역사에서 농업 생산에 철제 농기구를 활용하던 단계로 들어선 이래 오랜 세월 동안 농기구의 기본적인 재질은 철제(鐵製)의 틀을 벗어나지 않았다.417) 철제 농기구의 기본적인 재질의 변화는 아주 최근인 현대 과학 문명시대에 접어든 이후에 나타나게 되었고, 또한 농기구를 작동시키는 동력에서도 인력이나 축력 대신에 증기 기관 등의 기계력(機械力)을 활용하게 된 것도 서양에서 근대 산업 혁명이 일어난 이후의 일이었다.

<조선시대 볏과 보습>   
경기도 용인 언남 유적에서 출토된 철제 볏과 보습이다. 조선 전기 유적에서 볏 달린 보습이 출토된 것은 당시에 흙을 완전히 갈아엎는 깊이갈이를 하였음을 말해 준다. / ※ 기간행 책자에는 조선 전기 유적으로 집필되었으나 2011년 조사 결과 용인 언남동 유적이 통일신라~고려 초 시기의 것으로 보고되었기 때문에 본 사이트 상에서는 이를 밝혀둔다.

조선시대의 농민들도 주로 철제 농기구를 사용하였다. 철제 농기구가 오랜 시간에 걸쳐 농업 생산 수단의 대종으로 정착되어 내려오는 동안 농업 생산 활동의 각 부분인 기경·파종·제초·수확 등에 쓰는 농기구도 마찬가지로 오랜 세월 동안에 걸쳐 사용되었다. 조선 전기 이전에 이미 기경, 숙치, 복종, 제초 등 각각의 개별적인 농작업마다 대응하는 농기구가 구비되어 있었다. 『농사직설』을 중심으로 조선 전기의 농기구 구성 체계를 농작업별로 검토할 수 있다.

15세기 조선의 농업 생산에 기본적인 기경용(起耕用) 농기구로 사용된 것은 쟁기였다. 그런데도 『농사직설』의 본문 속에는 쟁기를 의미하는 ‘여(犁)’라는 글자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우경(牛耕)’, ‘엄경(掩耕)’ 등 기경을 의미하는 단어 용례와 “두 이랑 사이를 천경(淺耕)하여 대두를 파종하고, 양맥을 수확한 다음 맥근(麥根)을 갈아서 두근(豆根)을 덮는다.”라 는 표현에서 일반적으로 기경 작업에 쟁기를 활용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418)

<쟁기와 소멍에>   
쟁기의 골격은 술과 성에로 이루어진다. 술은 쟁기의 몸체가 된 나무이고, 성에는 술의 중간 윗부분에서 앞으로 뻗어나간 나무이다. 숟가락처럼 생긴 술 끝에는 땅을 가는 보습이 달려 있는데, 삽과 비슷한 작용을 한다. 보습 끝에 고정된 뾰족한 쇠판은 볏으로 위쪽에 갈린 흙(볏밥)을 한쪽으로 떠넘기는 역할을 한다. 멍에는 소의 목에 얹는 굽은 나무로, 짐을 운반하거나 쟁기를 끌 때에 이것에 의하여 힘을 받는다.

쟁기의 구조 가운데 볏이라는 부품이 있다. 볏의 기능은 쟁기날인 보습이 파 올린 흙덩이, 즉 쟁깃밥을 완전히 뒤집어 토양의 전면적인 기경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다. 쟁기날이 들어가는 깊이에 자리하고 있는 하층의 토양을 상층으로 끌어올리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부속품이 바로 볏이었다. 조선 초기에 활용한 쟁기에도 볏이 붙어 있었다. 『농사직설』에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녹두를 갈아엎어 땅속에 밀어 넣고 작물비(作物肥)로 활용하는 방안을 제시한 것이 있는데, 이러한 작업에 활용하는 쟁기에 볏이 달려 있지 않았다고 보기 어렵다.

<써레>   
논에 씨를 뿌리거나 심으려면 땅을 쟁기로 일군 다음에, 덩어리진 흙을 부수며 바닥을 판판하게 삶아야 한다. 써레는 논을 삶는 데에 활용한 대표적 농기구이다. 써레몽둥이(써레의 몸이 되는 가로대)에 둥글고 끝이 뾰족한 살 6∼10여 개를 빗살처럼 나란히 박고 위에 손잡이를 가로 대었다. 써레몽둥이 양쪽에 밧줄을 매어 소가 끌게 하였다.

논과 밭을 기경한 뒤에 수행하는 숙치, 마평 작업에 활용하는 대표적인 농기구는 써레(鄕名 所訖羅)와 쇠스랑(鐵齒擺, 鄕名 手愁音)이었다.419) 써레는 특히 논에 물을 채운 다음 바닥을 평탄하고 고르게 만들 때 이용한 농기구이다. 그리고 쇠스랑은 전답을 정돈할 때 사용할 뿐만 아니라 농가에서 작업을 할 때 이용한 농기구였다. 농가에서는 삽(鍤·臿)이나, 가래도 활용하여 전답의 숙치, 마평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특히 가래는 수전의 논 고르기 등 전토 정리 작업에 대략 세 명이 한 조가 되어 작업을 수행할 때 활용한 농기구이다.

<호미의 모양과 분포>   
<나물 캐는 여인>   
윤두서의 손자인 선비 화가 윤용(尹愹, 1708∼1740)이 망태기와 호미를 들고 돌아선 여인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나물을 캐는 용도로도 쓴 호미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제초 작업에 쓰는 농기구인 호미의 날 모양은 지방의 자연 조건과 농작물에 따라 달랐다. 대체로 북쪽으로 갈수록 날이 크고 무거운 대신, 남쪽 것은 날이 뾰족하고 작다. 북쪽의 호미는 날 끝이 뭉툭하고 넓적하여 농지 표면을 긁어 주는 데 유용하였다. 대체로 북쪽의 호미는 밭호미, 남쪽의 호미는 논호미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제초는 작물의 생장을 저해하는 잡초를 제거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다. 또한 잡초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제대로 농업 생산에 반영되지 않는 이른바 쭉정이를 없애는 것도 필요한 작업이다. 『농사직설』에서 잡초 제거와 쭉정이를 없애는 작업은 수운(手耘)이라고 하여 손으로 수행하는 경우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호미를 농기구로 이용하였다. 제초 작업은 가뭄이 들기 시작하는 시기라 하더라도 멈추어서는 안 되었다.420) 물을 채운 수전에서 제초 작업을 수행하다 보면 온몸이 진흙으로 더럽혀지기가 일쑤였다. 제초가 고된 농작업이기 때문에 호미를 활용하는 작업이 마무리된 다음 ‘호미씻이’라는 성대한 행사가 벌어졌 던 것이다. 당시의 농민들은 기본적인 제초용 농기구인 호미를 손에 들고 앉는 자세로 제초 작업을 수행하였는데, 현재 통용되는 호미와 형태나 기능 면에서 동일하였다.

<벼베기>   
낫은 작물을 수확하는 농기구이다. 심사정(沈師正, 1707∼1769)이 그린 이 풍속화에서 낫으로 벼를 베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볼 수 있다. 낫은 수확뿐 아니라 시비용으로 풀을 베거나 산야의 초목을 베어 내는 데에도 사용하였다.
<벼타작>   
낫으로 거둔 곡물을 타작마당으로 옮겨 놓으면 이제 본격적으로 볏단이나 보릿단에서 이삭을 털어 내는 작업을 하였다. 이때 활용한 농기구로 개상, 벼훑이, 도리깨 등이 있다. 일꾼들이 볏단, 보릿단을 들고 내리쳐서 곡식 알갱이를 떨어 낼 수 있게 만든 나무로 만든 틀이 개상이다. 김홍도가 그린 이 풍속화에 나오는 농기구가 바로 개상이다. 볏단을 들고 개상에 내리치는 작업을 태질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벼훑이는 두 개의 나뭇가지나 수숫대 등으로 집게같이 만들어 그 틈에 벼이삭을 끼고 훑어 내는 간단한 도구이다. 이것으로는 온종일 벼 한 섬을 훑을 수 있다고 한다.

『농사직설』의 수확용 농기구는 낫이었다. 미리 풀을 베어 시비 재료를 만들도록 권장할 때 등장하는 농기구도 자루가 긴 낫이었다. 낫을 수확 작업뿐 아니라 산야의 초목을 베어 내는 작업에 이용하는 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내려온 전통적인 관행이었다. 낫으로 작물을 수확한 다음 이렇게 획득한 작물을 사람이 먹으려면 몇 단계 작업을 더 거쳐야만 하였다. 농사일의 고단 함은 이렇듯 땅을 기경하는 순간부터 수확한 이후까지 이어지는 것이었다. 농민의 수고로움이 곡식의 한 알 한 알에 배지 않을 수 없었다.

<디딜방아>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하여 발로 디디어 곡식을 찧는 방아이다. 한 사람이 딛고 한 사람이 께끼는 것과, 두 사람이 딛고 한 사람이 께끼는 두가지 유형이 있다. 한 사람이 딛는 방아의 채는 짧고 가늘며, 두 사람이 딛는 방아의 채는 길며 뒷뿌리가 제비꼬리처럼 좌우로 갈라져 있다. 채의 앞머리에는 공이가 달려 있어서 돌로 만든 확 속의 낟알을 벗기는 구실을 한다.
<연자방아>   
알곡 및 가루를 내는 도구로 연자매라고도 부른다. 방아는 디딜방아·연자방아·물레방아의 순서로 발달해 왔다. 연자방아의 원리는 윗돌의 중심에 구멍을 뚫고 나무 막대를 가로질러서 소의 멍에에 고정시키면 소가 돌면서 돌을 돌리게 된다. 돌은 요철(凹凸)로 만들어져서 집어넣은 곡식이 돌아가는 돌의 압력에 눌려 으깨지면서 껍질이 벗겨지거나 가루가 나게끔 되어 있다.

수확한 곡물은 일련의 도정(搗精) 작업을 거쳐야 사람이 먹을 수 있는 형태를 띠게 되었다. 우선 곡물의 낟알을 떨어내는 작업을 수행하고, 그런 다음 낟알에서 겉껍질과 속껍질을 차례로 벗겨내는 작업이 필요하였다. 전자는 타작(打作)이라 부르고, 후자는 구체적으로 도정이라 불렀다. 타작에 동원되는 농기구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도리깨를 많이 이용하였다. 그리고 도정 작업에 사용한 농기구는 맷돌과 절구 두 가지 계통으로 나뉜다.421) 먼저 맷돌은 곡식의 껍질을 벗겨 낼 때 사용할 뿐 아니라 도정한 알곡을 빻을 때에도 사용하였다. 맷돌은 기본적으로 인력에 의존하는 농기구였지만, 축력으로 소의 힘을 이용하면서 연자매라는 농기구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다음으로 절구 계통에 속하는 돌절구와 나무절구도 맷돌과 마찬가지로 이용되었다. 절구 계통에는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하되 인력에 의지하는 디딜방아와 수력(水力)을 사용하는 물방아가 있었다. 물방아의 원리를 좀 더 발전시켜 수력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물레방아도 도정하는 데에 이용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필자] 염정섭
416)중국사의 경우 농기구가 직접 생산 현장에 투하된다는 점에서 그 발달과 진보의 모습이 곧장 농업 생산력의 발달로 이어진다고 파악하고 있다(퍼킨스, 양필승 옮김, 『중국 경제사 1368∼1968』, 신서원, 1997).
417)한국사에서 많이 지적되는 4∼6세기의 신라 사회의 분화는 바로 철제 농기구의 광범위한 보급이라는 배경 속에서 나타난 것이었다(전덕재, 「신라 주군제의 성립 배경 연구」, 『한국사론』 22, 서울 대학교 국사학과, 1990 ; 「4∼6세기 농업 생산력의 발달과 사회 변동」, 『역사와 현실』 4, 한국 역사 연구회, 1990 ; 김재홍, 「살포와 철서(鐵鋤)를 통해서 본 4∼6세기 농업 기술의 변화」, 『과기 고고 연구』 2, 아주 대학교 박물관, 1997).
418)『농사직설』 종대두소두녹두(種大豆小豆菉豆)(『농서』 1, 18면).
419)목작(木斫)과 소흘라(所訖羅)의 문제는 다음 연구에 상세히 정리되어 있다. 김용섭, 「조선 시기 목작과 소흘라를 통해서 본 농법 변동」, 앞의 책, 1990.
420)『세종실록』 권112, 세종 28년 5월 신사.
421)이춘녕·채영암, 『한국의 물레방아』, 서울 대학교 출판부,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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