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Ⅱ. 선사 시대의 문화와 국가의 형성2. 국가의 형성[2] 여러 나라의 성장

삼한(한)

고조선 남쪽 지역에는 일찍부터 진이 성장하고 있었다. 진은 기원전 2세기경에 고조선의 방해로 중국과의 교통이 저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진에는 고조선 사회의 변동에 따라 대거 남하해 오는 유이민에 의하여 새로운 문화가 보급되어 토착 문화와 융합되면서 사회가 더욱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마한, 변한, 진한의 연맹체들이 나타났다.

마한은 천안⋅익산⋅나주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경기⋅충청⋅전라도 지방에서 발전하였다. 마한은 54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졌고, 모두 10여만 호였다. 그 중에서 큰 나라는 1만여 호, 작은 나라는 수천 호였다.

변한은 김해⋅마산 지역을 중심으로, 진한은 대구⋅경주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변한과 진한은 각기 12개국으로 이루어졌고, 모두 4만~5만 호였다. 그 중에서 큰 나라는 4000~5000호, 작은 나라는 600∼700호였다.

삼한 중에서 마한의 세력이 가장 컸으며, 마한을 이루고 있는 소국의 하나인 목지국의 지배자가 마한왕 또는 진왕으로 추대되어 삼한 전체의 주도 세력이 되었다. 삼한의 지배자 중에서 세력이 큰 것은 신지, 작은 것은 읍차 등으로 불렸다.

한편, 삼한에는 정치적 지배자 외에 제사장인 천군이 있었다. 그리고 신성 지역으로 소도가 있었는데, 이 곳에서 천군은 농경과 종교에 대한 의례를 주관하였다. 천군이 주관하는 소도는 군장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죄인이라도 도망을 하여 이 곳에 숨으면 잡아가지 못하였다. 이러한 제사장의 존재에서 고대 신앙의 변화와 제정의 분리를 엿볼 수 있다.

소국의 일반 사람들은 읍락에 살면서 농업과 수공업의 생산을 담당하였으며, 초가지붕의 반움집이나 귀틀집에서 살았다. 또, 공동체적인 전통을 보여주는 두레 조직을 통하여 여러 가지 공동 작업을 하였다.

삼한에서는 해마다 씨를 뿌리고 난 뒤인 5월과 가을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10월에 계절제를 열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이러한 제천 행사 때에는 온 나라 사람이 모여서 날마다 음식과 술을 마련하여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즐겼다.

삼한 사회는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농경 사회였다. 철제 농기구의 사용으로 농경이 발달하였고, 벼농사를 지었다. 특히, 변한에서는 철이 많이 생산되어 낙랑, 왜 등에 수출하였다. 철은 교역에서 화폐처럼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철기 시대 후기의 문화 발전은 삼한 사회의 변동을 가져왔다. 지금의 한강 유역에서는 백제국이 성장하면서 마한 지역을 통합해 갔다. 또, 낙동강 유역에서는 구야국이, 그 동쪽에서는 사로국이 성장하여 중앙 집권국가의 기반을 마련하면서 각각 가야 연맹체와 신라의 기틀을 다져 나갔다.

도움글

마한 목지국

마한 목지국은 처음에 성환⋅직산⋅천안 지역을 중심으로 발달하였으나, 백제의 성장과 지배 영역의 확대에 따라 남쪽으로 옮겨 익산 지역을 거쳐 마지막에 나주 부근(오늘날의 대안리, 덕산리, 신촌리, 복암리)에 자리잡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왕을 칭하던 국가 단계의 목지국이 언제 망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천안 지역에 근거를 둔 초기 마한은 4세기 후반, 그리고 나주의 마한은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까지 존속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여, 마한의 바탕 위에서 성장한 백제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영역을 잠식해 들어갔다.

귀틀집

큰 통나무로 정(井)자 모양으로 귀를 맞추어 층층이 얹고 틈을 흙으로 발라 지은 집
마한의 무덤(전남 나주 용호리)
마한의 토실(충남 공주 장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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