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Ⅳ. 경제 구조와 경제 생활2. 중세의 경제[2] 경제 활동

농민의 경제 생활

농민은 조상이 물려준 토지인 민전을 경작하거나, 국⋅공유지나 다른 사람의 소유지를 경작하였다. 또, 품팔이를 하거나 부녀자들이 삼베, 모시, 비단 등을 짜는 일을 하여 생계를 유지하였다.

대개 농민은 소득을 늘리려고 황무지를 개간하고 새로운 농업 기술을 배웠다. 농민이 진전이나 황무지를 개간하면 국가에서 일정 기간 소작료나 조세를 감면해 주었다. 경작하던 주인이 방치해서 황폐해진 토지인 진전을 개간할 때, 주인이 있으면 소작료를 감면해 주고, 주인이 없으면 개간한 사람의 토지로 인정해 주었다.

12세기 이후에는 연해안의 저습지와 간척지도 개간되어 경작지가 확대되어 갔다. 특히, 강화도 피난 시기 이후에는 강화도 지방을 중심으로 한 간척 사업이 추진되었다.

수리 시설의 발달도 이루어졌다. 김제의 벽골제와 밀양의 수산제가 개축되었으며, 소규모의 저수지도 확충되었다.

호미와 보습 등 농기구와 종자도 개량되었다. 소를 이용한 깊이갈이가 일반화되고 시비법이 발달하면서 휴경지가 점차 줄어 계속해서 경작할 수 있는 토지가 늘었다. 밭농사는 2년 3작 윤작법이 점차 보급되었고, 논농사도 고려 말에는 직파법 대신에 이앙법(모내기)이 남부 지방 일부에 보급될 정도로 발전하였다. 고려 후기에는 이암이 중국의 농서인 농상집요를 소개하였고, 문익점은 목화씨를 가져와 목화 재배가 이루어졌다.

읽기자료

고려의 농업

○ 큰 산과 깊은 계곡이 많아 험하고 평지가 적다. 그러므로 경작지가 산간에 많은데, 오르내리면서 경작하는 데 힘이 많이 들고 멀리서 보면 계단과 같다. 〈고려도경
○ 〔명종 18년(1182) 3월〕 때에 맞추어 농사를 권장하고 힘써 제언(堤堰)을 수축하여 저수(貯水)하고 물을 대게 하여, 황모지(荒耗地)가 없도록 하여 백성들의 먹을거리를 풍족하게 하라. 〈고려사〉

시비법(施肥法)의 발달

밭을 묵혀서 그 밭에 자란 풀을 태우거나 갈아엎어 비료를 주던 방식에서 들의 풀이나 갈대를 베어 와 태우거나 갈아엎은 녹비에 동물의 똥오줌을 풀이나 갈대와 함께 사용하는 퇴비가 만들어졌다.
고려 후기 강화도의 간척지 〈최영준, 국토와 민족 생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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