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Ⅳ. 경제 구조와 경제 생활4. 근대 태동기의 경제[2] 서민 경제의 발전

농민 경제의 변화

농민은 황폐한 농토를 다시 개간하고 수리 시설을 복구하였으며, 생산력을 높이기 위하여 농기구와 시비법을 개량하고, 새로운 영농 방법을 시도하였다.

모내기법을 확대하여 벼와 보리의 이모작으로 단위 면적당 생산량을 증가시켜 소득을 증대하였다. 이모작이 널리 행해지면서 보리 재배가 확대되었고, 논에서의 보리 농사는 대체로 소작료의 수취 대상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소작농들은 보리 농사를 선호하였다.

농민은 농업을 경영하는 방식도 변화시켰다. 모내기법으로 잡초를 제거하는 일손을 덜 수 있게 되자, 농민은 경작지의 규모를 확대하였다. 지주들도 직접 경작하는 토지를 넓혔지만, 자작농은 물론 일부 소작농도 더 많은 농토를 경작하여 재산을 모을 수가 있었다. 이전보다 넓은 농토를 경작할 수 있게 된 광작 농업으로 농가의 소득이 늘어나 부농이 될 수 있었다.

또, 농민들은 시장에 팔기 위한 작물을 재배하여 가계 수입을 증가시켰다. 장시가 점차 증가하여 상품의 유통이 활발해짐에 따라, 농민은 쌀, 목화, 채소, 담배, 약초 등을 재배하여 팔았다. 특히, 쌀의 상품화가 활발하였다. 쌀은 이 시기에 이르러 그 수요가 크게 늘어나 장시에서 가장 많이 거래되었다. 쌀의 수요가 늘면서 밭을 논으로 바꾸는 현상이 활발하였다.

소작 농민은 좀더 유리한 경작 조건을 얻어 내기 위하여 지주에게 대항하여 소작 쟁의를 벌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소작권을 인정받아 지주가 함부로 소작지를 빼앗지 못하고, 수확량의 반을 내던 소작료도 일정 액수를 곡물이나 화폐로 내도록 하는 변화가 나타났다. 소작농이라도 상품 작물을 재배하거나 소작권을 인정받고 소작료도 일정 액수만 내게 되면서, 근면하고 시장 경제를 잘 이용하는 농민은 점차 소득을 증가시킬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일부 농민은 토지를 개간하거나 매입하여 지주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부 농민이 소득을 증대시켜 부자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토지를 잃고 몰락해 가는 농민도 증가하였다. 부세의 부담, 고리채의 이용, 관혼상제의 비용 부담 등으로 견딜 수 없게 된 가난한 농민은 헐값에 자신의 토지를 내놓았다. 양반 관료, 토호, 상인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토지를 매입하였다.

광작이 가능해지면서 대부분의 농토를 소작시키고 일부 농토만 직접 경영하던 지주도 소작지를 회수하여 노비를 늘리거나 머슴을 고용하여 직접 경영하였다. 이 때문에 소작 농민은 소작지를 잃기는 쉬워지고 얻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농촌을 떠난 농민은 도시로 옮겨 가 상공업에 종사하거나 임노동자가 되었으며, 광산이나 포구를 찾아 임노동자가 되었다. 그리하여 이 시기에 광산, 포구 등에는 새로운 도시가 형성되기도 하였다. 황해도의 수안, 충청도의 강경, 함경도의 원산 등이 그러한 곳이었다.

읽기자료

상품 작물의 재배

농민이 밭에 심는 것은 곡물만이 아니다. 모시, 오이, 배추, 도라지 등의 농사도 잘 지으면 그 이익이 헤아릴 수 없이 크다. 도회지 주변에는 파밭, 마늘밭, 배추밭, 오이밭 등이 많다. 특히, 서도 지방의 담배밭, 북도 지방의 삼밭, 한산의 모시밭, 전주의 생강밭, 강진의 고구마밭, 황주의 지황밭에서의 수확은 모두 상상등전(上上等田)의 논에서 나는 수확보다 그 이익이 10배에 이른다. 〈경세유표

소작료(지대)의 형태

- 타조법:일정 비율로 소작료를 내는 방식이다.
- 도조법:일정 액수를 소작료로 내는 방식으로, 점차 화폐로 내는 경향이 나타났다.
19세기 초의 도별 저수지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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