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Ⅴ. 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4. 근대 태동기의 사회[3] 사회 변혁의 움직임

농민의 항거

19세기의 세도 정치하에서 국가 기강이 해이해진 틈을 타 탐관오리의 부정과 탐학은 끝이 없었다. 삼정의 문란으로 극도에 달한 수령의 부정은 중앙 권력과도 연계되어 있어 암행어사의 파견만으로 막을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농촌 사회가 피폐하여 가는 가운데 농민의 사회 의식은 오히려 더욱 강해져 갔다.

농민은 지배층의 압제에 대하여 종래의 소극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보다 적극적으로 그들과 대결하였다. 처음에는 벽서, 괘서 등의 형태로 나타나던 농민의 항거는 점차 농민 봉기로 변화되어 갔다. 농민의 항거 중에 가장 규모가 큰 것은 평안도에서 일어난 홍경래의 난(1811)과 단성에서 시작되고 곧이어 진주로 파급되어 전국으로 확산된 농민 항쟁이었다(임술 농민 봉기, 1862).

홍경래의 난은 몰락한 양반홍경래의 지휘하에 영세 농민, 중소 상인, 광산 노동자 등이 합세하여 일으킨 봉기였다. 이들은 처음 가산에서 난을 일으켜 선천, 정주 등을 별다른 저항없이 점거하였다. 한때는 청천강 이북 지역을 거의 장악하였으나 5개월 만에 평정되었다. 홍경래의 난 이후에도 사회 불안은 수그러들지 않아 각지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그렇지만 관리들의 부정과 탐학은 시정되지 않았다.

임술 농민 봉기진주를 중심으로 확산되었는데, 농민들은 탐관오리와 토호의 탐학에 저항하여 한때 진주성을 점령하기도 하였다. 이를 계기로 농민의 항거는 북쪽의 함흥으로부터 남쪽의 제주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으로 퍼졌다. 이러한 저항 속에 농민들의 사회 의식은 성장하였고, 농민들의 항쟁으로 말미암아 양반 중심의 통치 체제도 점차 무너져 갔다.

읽기자료

홍경래격문

평서대원수는 급히 격문을 띄우노니 관서의 부로(父老)와 자제와 공⋅사천민들은 모두 이 격문을 들으라. 무릇 관서는 성인 기자의 옛 터요 단군 시조의 옛 근거지로서 의관(衣冠:유교 문화를 생활화하는 사람)이 뚜렷하고 문물이 아울러 발달한 곳이다. ……
그러나 조정에서는 관서를 버림이 분토(糞土)와 다름없다. 심지어 권세 있는 집의 노비들도 서토의 사람을 보면 반드시 ‘평안도놈’이라고 말한다. 어찌 억울하고 원통하지 않은 자 있겠는가. ……
지금, 임금이 나이가 어려 권세 있는 간신배가 그 세를 날로 떨치고, 김조순⋅박종경의 무리가 국가 권력을 오로지 가지고 노니, 어진 하늘이 재앙을 내린다. ……
이제 격문을 띄워 먼저 여러 고을의 군후(君侯)에게 알리노니, 절대로 동요하지 말고 성문을 활짝 열어 우리 군대를 맞으라. 만약 어리석게 항거하는 자가 있으면 철기 5000으로 남김없이 밟아 무찌르리니, 마땅히 속히 명을 받들어 거행함이 가하리라. 대원수. 〈패림〉

삼정의 문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수취 제도 문란으로 전정(전세 수취 제도), 군정(군포 징수 제도), 환곡(구휼 제도)의 문란을 말한다.

벽서, 괘서(掛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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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의 농민 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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