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Ⅴ. 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5. 근⋅현대의 사회[2] 일제 강점기의 사회 변화

의식주 생활의 변화

근대 문명의 유입은 의식주 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먼저, 의생활에서는 직장인을 중심으로 양복을 입는 사람이 늘어났다. 그러나 대부분은 여전히 한복을 입으면서 고무신을 신고 모자를 쓰는 방식으로 한식과 양식을 혼합하였다.

1910년대까지만 해도 대부분 여성은 쪽진 가르마머리를 하였으나, 블라우스와 스커트 차림, 단발머리와 파마머리, 스타킹과 하이힐 등은 도시에서는 그리 낯선 풍경이 아니었다.

1940년대에 전시 체제가 되면서 남녀의 복장이 모두 바뀌었다. 남자는 한복이나 양복 대신 국방색 국민복을 입고, 전투모에 각반을 찼다. 여자는 치마 대신 일본 농촌 여성의 작업복인 몸뻬라는 바지를 입어야 했다.

식생활에도 큰 변화가 나타났다. 1910년 이후, 과자, 빵, 케이크, 카스텔라, 비프스테이크, 수프, 아이스 크림 등 서양 음식이 대중에게도 본격 소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서양 식품의 소비는 주로 도시의 상류층에 한정되어 있었으며, 일반 서민의 식생활은 형편이 사뭇 달랐을 뿐 아니라, 식량 사정이 매우 나빴다. 산미 증식 계획 이후에 식량이 증산되었는데도 한국인 1인당 쌀 소비량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여기에, 중⋅일 전쟁 후에 쌀 공출제를 실시함에 따라 식량 부족 현상은 더욱 심각해졌다. 서민은 잡곡밥, 조밥, 수수밥을 먹거나, 심지어는 소나무 속껍질로 만든 송기떡, 콩깻묵, 밀기울, 술찌기를 먹으면서 연명하기도 하였다.

도시에 사람이 몰리면서 이전에 볼 수 없던 주택이 나타났다. 1920년대 이후에 상류층의 문화 주택, 중류층의 개량 한옥, 중⋅하류층의 영단 주택이 등장하였다.

1920년대에 지어진 개량 한옥은 사랑채가 생략되고, 대청마루에 유리문을 달고 문간에 중문이 달리고 문간방이 생기며 장식적 요소들이 가미된 도시형의 상품 주택이었다. 1930년대에 나타난 문화 주택은 2층 양옥으로, 전에 없던 복도와 응접실, 침실, 아이들 방 등 개인의 독립된 공간이 생겨났다. 영단 주택은 1940년대 들어 도시민, 특히 서민의 주택난을 해결하려고 지은 일종의 국민 연립 주택이었다.

서울 변두리에는 빈민이 토막집을 짓고 살았다. 토막살이를 하는 사람은 1937년 서울(경성부) 총인구 70만여 명 중에서 15,000여 명에 달하였다.

단발머리

1920년에 미용사 오엽주가 일본에서 돌아와 화신 백화점에 미용실을 개업해 단발머리를 보급하면서 유행했다. 단발머리에 대한 토론회가 열릴 정도로 논란이 있었는데, 신학문을 한 이들 말고는 대부분 부정적이었다.

주택 공간의 변화

문화 주택, 개량 한옥 같은 새로운 건축 양식이 등장함에 따라 남녀의 주거 공간을 구분하던 전통적인 양반가의 주택과는 달리, 남녀가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이는 남녀 사이의 차별이나 내외하던 관습이 그만큼 약화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토막집

맨땅 위에 자리를 깔고 짚이나 거적때기로 지붕과 출입구를 만든 원시적인 움막집
신여성의 옷차림(1940)
몸뻬(1940)
국민복 차림의 학생들(1939)
남산 일대의 일본식 주택(1920년대)
삼판동(현 후암동) 문화 주택(1930년대)
거적을 둘러친 토막집(193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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