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Ⅵ. 민족 문화의 발달3. 근세의 문화[2] 성리학의 발달

학파의 형성과 예학의 발달

16세기 중반부터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면서 학설과 지역적 차이에 따라 서원을 중심으로 학파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선조 때에 서경덕 학파와 이황 학파, 조식 학파가 동인을 형성하였으며, 이이 학파와 성혼 학파가 서인을 형성하였다. 광해군 때, 북인은 중립 외교를 취하는 등 성리학적 의리 명분론에 크게 구애받지 않았다. 이는 서인남인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정국을 주도하자, 서경덕조식의 사상, 양명학, 노장 사상 등은 배척당하고, 이황이이의 학문, 즉 주자 중심의 성리학만 조선 사상계에서 확고한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후 서인남인은 명에 대한 의리 명분론을 강화하고 반청 정책을 추진하여 병자호란을 초래하였다. 이후 격렬한 주화⋅척화 논의를 거쳐 인조 말엽부터 송시열서인 산림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척화론과 의리 명분론이 대세를 이루었다. 이 시기에 각 학파는 대동법호포법 등 사회⋅경제 정책을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과 대립을 하기도 하였다.

17세기는 예학의 시대라고 할 정도로 예학이 발달하였다. 이 무렵 예는 양난으로 인하여 흐트러진 유교적 질서의 회복이 강조되면서 더욱 중시되었다. 예가 사회를 이끌어 가는 하나의 방도로서 부각되어, 학문은 예학보다 절실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널리 퍼지고 예치가 강조되었다. 이처럼 예학 연구가 심화되어 각 학파 간 예학의 차이는 전례 논쟁을 통하여 표출되었으며, 예송은 그 대립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의리 명분론

도덕성에 기반하여 의리와 명분을 중시한 성리학의 이론

척화론(斥和論)

청과 화의를 맺는 것에 반대하는 주장

예치(禮治)

개인, 사회, 국가를 예로 다스리는 것으로, 예를 가르치는 예교와 예를 배우는 예학을 통해서 실현된다.
창닫기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