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Ⅵ. 민족 문화의 발달5. 근⋅현대의 문화[1] 근대 문물의 수용과 발전

언론 기관의 발달

개항 이후 근대 인쇄술로 간행된 각종 신문과 출판물은 개화 사상과 애국 계몽 사상을 전파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우리 나라 최초의 신문은 1883년 박문국에서 간행한 한성 순보였다. 한성 순보는 국내 소식과 함께 서양의 신문화를 소개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으나, 갑신정변의 실패로 폐간되었다.

1896년에 서재필이 창간한 독립신문은 대중을 계몽하여 근대화를 촉진하려는 한글판과, 외국인에게 우리의 처지를 홍보하는 영문판으로 발행되었다.

국⋅한문 혼용체를 사용한 황성신문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을 실어 을사조약을 비판하고 민족 의식을 고취하였다. 한글 보급에 크게 기여한 대한매일신보는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 반대 운동, 국채 보상 운동 등을 주도하였다.

이 밖에, 한글 신문인 제국신문, 국⋅한문 일간지인 천도교의 만세보 등도 국권 회복 운동을 지원하고 민족 의식을 높이는 데 앞장섰다.

일제는 반일 보도를 차단하기 위하여 신문에 대한 사전 검열을 시도하였고, 1907년에 신문지법을 만들어 자주 독립을 요구하던 민족 언론을 탄압하였다.

도움글

대한매일신보와 베델

베델은 1904년에 러⋅일 전쟁이 일어나자, ‘런던 데일리 뉴스’의 특파원으로 내한하여 양기탁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였다. 대한매일신보는 을사조약의 무효를 주장하고, 고종의 친서를 게재하는 등 항일 언론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또, 1907년에는 국채 보상 운동이 일어나자, 이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일제가 탄압하는데도 대한매일신보가 항일 운동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영국인 베델이 사장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통감부는 1908년 5월에 영국 상하이 고등 법원에 베델을 제소하여 3주간의 금고 생활을 하게 하였다. 베델은 서울로 돌아온 후에도 항일 언론 활동을 펼치다가 1909년 5월 1일에 심장병으로 병사하여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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