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Ⅲ. 통일 신라와 발해1. 통일 신라와 발해의 발전[1] 신라가 통일 후에 새로 마련한 제도는?

새로운 제도의 마련

통일 후, 신라는 통일 국가에 걸맞게 여러 제도를 재정비하였다. 중앙의 정치는 왕의 직속 기관인 집사부를 중심으로 운영되었으며, 그 장관인 시중의 권한이 강화되었다. 시중은 왕명을 받들어 행정을 집행하고 국정을 책임지는 역할을 하였다. 집사부의 기능이 강화됨에 따라 화백 회의의 기능이 축소되고, 그 의장인 상대등의 권한도 약화되었다.

삼국 통일로 영토가 크게 넓어짐에 따라 지방 통치 조직도 새롭게 정비하였다. 전국을 9주로 나누고 주 밑에 군과 현을 두었으며, 지방관을 파견하여 다스렸다. 말단 행정 구역인 촌은 토착세력인 촌주로 하여금 관리하게 하였다.

주요 지방에는 특별 행정 구역으로 5개의 소경을 두어 일부 중앙 귀족과 옛 고구려, 백제의 귀족들을 옮겨 살게 하였다. 이것은 수도 금성이 한반도의 남동쪽에 치우쳐 있는 것을 보완하고, 또 지방 세력의 성장을 감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통일 신라는 군사 제도를 정비하여 9서당10정을 편성하였다. 중앙군인 9서당은 신라인 외에 고구려인, 백제인, 말갈인도 포함된 부대였다. 지방의 각 주에는 1개의 군단인 정을 배치하였는데, 특히 한주에는 2개의 정을 두어 전국에 모두 10정을 두었다.

통일 신라는 국가의 수입을 늘리고 귀족들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키기 위해 토지 제도를 정비하였다. 통일 후, 신문왕 때에는 문무관료들에게 관료전을 지급하고. 이전에 귀족에게 주었던 녹읍을 없앴다. 그리고 농민들에게도 정전을 주어 경작하게 하고 국가에 조세를 바치게 하였다. 그러나 후에 귀족들의 반발로 녹읍이 부활되었고, 귀족들은 이를 토대로 호사스러운 생활을 누렸다.

도움글

⋅ 신비스러운 피리 만파식적 ⋅

신문왕은 왕권 강화에 걸림돌이 되는 진골 귀족 세력을 철저하게 탄압하여 전제 왕권을 확립해 나갔다. 이와 관련하여 ‘만파식적’이라는 신비스러운 피리에 관한 전설이 ‘삼국유사’에 전해 오고 있다.
“이 피리를 불면, 적의 군사는 물러가고, 병은 낫고, 물결은 평온해진다.”
이 피리는 모든 정치적 불안이 진정되고 평화가 오기를 소망하는 신라인들의 염원을 담고 있다.

관료전

관리들이 관직에 복무하는 대가로 받은 토지였다.

녹읍

귀족들이 받는 녹봉의 일종으로서, 이것을 통해 농민을 지배할 수 있었다.
읽기자료

⋅ 귀족들의 생활상 ⋅

“재상 집에는 녹봉이 끊이지 않으며, 그의 예속인이 3000 명이고, 갑옷과 무기, 소, 말, 돼지의 수도 이와 비슷하였다. 가축은 바다 가운데의 섬에 목축하여 필요할 때 활로 쏘아서 잡아먹었다. 곡식을 남에게 꾸어 주고 갚지 못하면 노비로 삼았다.” ‘신당서’
성덕 대왕 신종비천상(국립 경주 박물관)
성덕 대왕 신종비천상(국립 경주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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