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Ⅲ. 통일 신라와 발해1. 통일 신라와 발해의 발전[3] 발해는 왜 ‘해동성국’이라고 불리었나?

발해의 정치 제도

발해는 나라의 안정을 되찾은 후, 당의 문물 제도를 받아들여 세련된 제도를 갖추는 데 힘을 기울였다. 발해는 독자적인 연호를 쓸 정도로 왕권이 강화되면서 정치 제도를 정비하였다.

중앙에는 왕 밑에 정당성, 선조성, 중대성의 3성이 있었고, 그 아래에 6부가 있었다. 발해의 3성은 외형상 당의 제도를 모방하였으나, 운영 방식은 독특하였다. 즉, 3성은 정당성을 중심으로 운영하였고, 정당성 아래에 6부를 두어 나라의 일을 나누어 처리하게 하였다. 그리고 국가의 중요한 일은 귀족들이 정당성에 모여서 회의를 열어 결정하였다.

지방 행정 구역은 5경 15부 62주로 조직되었다. 특히, 5경은 상경을 중심으로 하여 5도의 교통망으로 연결되었다. 그리고 말단에 있는 촌락은 토착 세력가에 의해서 다스려졌다. 이것은 고구려 계통의 지배층이 말갈의 전통적인 사회 조직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두 민족 사이의 조화를 꾀한 것이었다.

발해 멸망의 시대적 배경

10세기 초의 동아시아는 중국이 5대 10국의 혼란기였고, 한반도는 후삼국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발해는 이러한 국제정세를 이용하여 성장한 거란족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

발해 6부의 명칭

당의 6부(이, 호, 예, 병, 형, 공)와 달리, 발해는 유교 도덕을 나타내는 ‘충, 인, 의, 지, 예, 신’을 6부의 명칭으로 사용하였다.
도움글

⋅ 발해의 주민 구성 ⋅

발해의 주민 구성에 관해 일본의 ‘유취국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발해국은 고구려의 옛 땅이다. …… 그 넓이가 2천 리이고, 주⋅현의 숙소나 역은 없으나 곳곳에 마을이 있는데, 모두 말갈의 마을이다. 그 백성은 말갈인이 많고 원주민이 적다. 모두 원주민을 마을의 우두머리로 삼는데, 큰 촌은 도독이라 하고, 다음은 자사라 하고, (이들 마을의 우두머리를) 그 아래 백성들이 모두 수령이라 부른다.”
이 기록에 의하면, 발해의 백성은 말갈인과 원주민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주민은 옛 고구려인을 말한 것으로 보이므로, 지방 행정에 있어서 상위직은 대부분 고구려인이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상경성 제1궁전 및 회랑 터 | 중국 흑룡강성 영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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