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Ⅴ. 조선의 성립과 발전3. 왜란과 호란의 극복[3] 병자호란을 겪은 후에 북벌 운동을 추진한 까닭은?

병자호란

인조 때의 서인 정권광해군 때와는 달리 명을 가까이하고 후금을 배척하는 정책을 펴서 후금의 경계심을 사게 되었다. 마침 조선에서 이괄의 난이 일어나 사회가 혼란해지자, 후금의 군대가 이를 틈타 압록강을 건너 황해도 지역까지 쳐들어왔다(정묘호란, 1627). 그러나 당시에는 후금의 군사력이 조선을 무력으로 정복할 정도는 아니어서 일단 화의를 맺고 되돌아갔다.

그 후, 국력이 더욱 커진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조선을 압박하여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맺을 것을 요구해 왔다. 조선 정부가 이를 거절하자, 청의 태종은 10여만 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다시 쳐들어왔다(병자호란, 1636). 한양이 청군에 의해 점령되자, 인조는 신하들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45일간 항전하였으나, 결국 청의 요구를 받아들여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강화를 맺었다.

두 차례의 호란은 왜란에 비하여 전쟁 기간은 짧았지만. 서북 지방이 입은 피해는 적지 않았다.

이괄의 난

인조 2년(1624)에 이괄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반란. 이괄은 인조반정에 공을 세웠으나 2등 공신이 된 것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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