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Ⅶ. 개화와 자주 운동2. 개항과 개화 운동[2] 개화와 척사의 대립은 왜 일어났을까?

시찰단과 유학생의 파견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뒤 조선 정부는 개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에 따라 김기수김홍집이 일본에 수신사로 다녀와 일본의 발전된 모습을 국왕에게 보고하였다. 이어서 정부는 젊은 관리들을 일본에 파견하여 여러 정부 기구와 산업 시설, 문화 시설 등을 시찰하게 하였다.

이들은 귀국 후 각자 여행기와 시찰 보고서를 작성하여 국왕에게 제출하였다. 이는 정부의 개화 정책 추진에 도움이 되었다. 또, 정부는 청에도 유학생을 파견하여 톈진에서 근대 무기 제조 기술과 군사훈련법을 배우게 하였다.

정부는 개화 정책을 주관하기 위해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였고, 별기군이라는 신식 군대를 조직하여 일본에서 들여온 새로운 무기로 훈련시켰다.

통리기무아문

개항 이후의 정세 변동에 대응하기 위해 설치한 근대적 행정기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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