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Ⅶ. 개화와 자주 운동2. 개항과 개화 운동[2] 개화와 척사의 대립은 왜 일어났을까?

개화와 척사의 대립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 후 보다 적극적으로 개화 정책을 추진하여 나라를 발전시키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개화파라고 하였다.

그러나 많은 유생들은 서양 여러 나라와 일본을 오랑캐로 여기고, 그들과 접촉하는 것을 반대하면서 우리 고유의 유교 문화와 질서를 지켜야 한다는 위정척사 운동을 일으켰다.

이처럼 정부의 개화 정책이 실시되는 과정에서 개화론과 척사론이 대립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에 민씨 세력과 흥선 대원군 세력 사이의 갈등, 일본 세력의 침투에 대한 국민의 반발 등이 얽히면서 정치는 점점 혼란을 겪게 되었다.

개화 정책이 추진되는 가운데 구식 군인들은 신식 군대인 별기군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낮은 대우를 받고 있었다. 구식 군인들이 한동안 밀렸던 급료로 모래와 겨가 섞인 쌀을 받게 되자, 그들의 불만은 일시에 폭발하였다. 구식 군인들은 평소에 미워하던 정부의 고관들을 죽이고, 일본 공사관을 공격하였으며, 별기군의 일본인 군사 교관을 살해하였다. 이를 임오군란이라 한다(1882).

이를 계기로 흥선 대원군이 다시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조선에 세력을 침투시킬 기회를 엿보던 청이 군대를 보내 흥선 대원군을 납치해 감으로써 민씨 세력이 다시 정권을 잡았다. 이 때부터 청은 조선에 군사 고문과 외교 고문 등을 파견하여 내정에 간섭하였다.

게다가 조선 정부는 일본의 강압으로 제물포 조약을 맺고 임오군란 중에 일본측이 입은 피해에 대한 배상금을 지불하였으며, 나아가 일본 공사관의 경비를 구실로 일본군이 서울에 주둔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제물포 조약박영효가 일본에 사절로 파견되었는데, 이 때 태극기가 처음 사용되었다.

도움글

⋅ ‘조선책략’의 내용과 그 영향 ⋅

김홍집이 일본에 갔을 때 가지고 온 ‘조선책략’의 배포를 계기로 정부의 개화 정책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거세어졌다. 이 책은 황쭌셴이라는 중국의 외교관이 동아시아의 정세와 조선의 외교 정책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쓴 것이다. 그 주요 내용은, 러시아 세력이 남쪽으로 침투하는 상황에서 조선이 이를 막기 위해서는 ‘친중국, 결일본, 연미국’의 외교를 추진하면서 서양의 기술과 제도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고종은 이 책의 내용에 큰 관심을 가지고 서양과 수교하려는 뜻을 가졌으며, 이를 복사하여 관리와 유생들에게 배포하도록 하였다.
이에 대하여 정부의 개화 정책을 반대하는 유생들은 전국적으로 개화 반대의 상소를 올리면서 위정척사 운동을 전개하였다.

위정척사(衛正斥邪)

바른 것(正)을 지키고(衛), 그릇된 것(邪)을 배척(斥)한다는 뜻으로, 여기서 바른 것은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유교 문화를 이르고 그릇된 것은 서양의 문화와 사상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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