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Ⅶ. 개화와 자주 운동3. 동학 농민 운동과 갑오개혁[2] 동학 농민 운동의 전개 과정과 그 의의는?

고부 농민 봉기

외세의 경제적 침투와 정치의 혼란으로 농촌의 분위기가 어수선한 가운데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은 여러 가지 부정을 저지르며 농민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이에 전봉준은 “탐관오리를 제거하여 백성을 구한다.”는 구호를 내걸고, 농민들을 이끌고 관아를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곡식 창고를 풀어 농민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억울하게 옥에 갇힌 사람들을 풀어 주었다. 이것이 고부 농민 봉기로서, 동학 농민 운동의 시작이었다(1894).

정부에서는 이 일을 처리하기 위해 관리를 파견하였으나, 그들은 일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고 도리어 사태를 악화시켰다. 이에 전봉준동학 교단에서 세력을 가지고 있던 김개남, 손화중 등과 함께 농민들에게 통문을 돌리고 고부의 백산에서 농민군을 조직하였다.

도움글

⋅ 고부 군수 조병갑의 비리 ⋅

조병갑은 전에도 고부 군수를 지낸 일이 있어 두 번이나 고부 군수가 된 사람이었다. 그는 예부터 사용하던 저수지인 만석보는 그대로 둔 채, 농민들에게 노역을 시켜 새 저수지를 만들게 하고 물값을 비싸게 받았다. 새로 개간한 논에는 세금을 면제해 준다고 약속해 놓고, 개간 후 수확을 하면 강제로 세금을 거두어 갔다. 토지세 12말을 16말로 늘려 그 차액을 챙겼으며, 자기 부친의 선정을 기리는 비석을 세운다고 백성들에게서 빼앗다시피 하여 2만 냥을 모았다.
그는 또 불효죄, 화목하지 않은 죄, 음란한 죄 등의 명목으로 농민들에게 죄를 씌워 그 대가로 돈을 빼앗았다. 돈을 낼 수 없는 사람은 곤장을 맞았다.
이러한 횡포를 시정하고자 전봉준의 아버지가 군수를 찾아가 농민들의 어려운 사정을 고하자, 조병갑은 고을 군수를 업신여긴다며 매를 때려 내쫓았다. 전봉준의 아버지는 이 일로 병을 얻어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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